지상의 밤... 영어 제목보다 한국어 제목이 조금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지상... 어떻게 들어도 참 멜랑꼴리 하고 센티멘탈하다. 2년이 지나면 이 영화도 30년 전 영화가 되니 지금 이런 영화들을 고전처럼 찾아보고 있을지 모를 나보다 어린 세대들에겐 어쩌면 90년대 후반의 내가 70년대의 스콜세지 영화를 보았을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일까. 그런데 80년도에 영원한 휴가를 만든 짐 자무쉬를 스콜세지와 거의 동시대의 감독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텐데 이 두 감독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임권택과 홍상수 사이에서 감지되는 세대차이가 느껴진다. 짐 자무쉬가 도시 뒷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파편처럼 부유하는 인물들을 최대한 날 것으로 표현해낸다면 스콜세지는 그런 인물들에 묵직한 표정과 목소리를 부여하며 아주 드라마틱한 원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늘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린다.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니로가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택시 운전수, 트래비스. 세상 모든 영화 속의 택시 운전기사들을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트래비스를 떠올리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다. 그런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도 트래비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고. 그런데 실제 택시를 타면 오히려 지상의 밤 속의 택시 운전기사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생활 속에서 내가 일미터 반경 내에서 마주치는 인물들은 오히려 좀 더 평범하고 무덤덤한 표정일 거다. 세상을 이루는 나와 같은 한 조각, 작은 입자 같은 인물들 말이다.지상의 밤은 뉴욕, 로스앤젤레스, 파리, 로마 그리고 헬싱키 에피소드로 나뉘어져있고 그들의 밤을 운전하는 5명의 택시기사들의 이야기이다. 매번 이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마지막 도시는 헬싱키가 아닌 도쿄였다고 착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쿄 에피소드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헬싱키를 겨우 생각해내곤 한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아마 헬싱키가 생뚱맞은 배경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영화에서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호텔 로비에 매달려있는 시계들을 떠올리면 상식적으로 그런 시계들이 보통 런던 파리 뉴욕 홍콩 도쿄 뭐 이런 곳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서도 였을 거다. 새해에 헬싱키에서 보낸 짧은 하루 탓에도 연초부터 이 영화 생각을 유독 많이 했다. 번화한 헬싱키의 중심가를 향하는 공항철도가 거리 낙서로 가득한 평범하고도 무뚝뚝한 주거 단지들을 휙휙 스쳐 지나쳤다. 직장에서 해고된 동료를 대신해 신세 한탄을 하던 남자들이 택시에서 내려 비틀대며 걸어가던 것과 꼭 같은 그 눈 덮인 거리를 하루 상간에 왔다 갔다 지나치며 결국 헬싱키 그 특유의 암울한 어둠이 기억났고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일상적인 대사로만 채워진 그 짧은 에피소드들에서 자무쉬는 참 풍부한 느낌을 담아냈구나 다시 감탄했다.
로스앤젤레스 에피소드에서는 가위손의 긴 머리 소녀에서 리얼리티 바이츠의 숏커트 여인으로 성장하는 중의 보물 같은 위노나 라이더를 만날 수 있다. 운전 내내 담배를 꼬나물고 되바라진 톤의 대사를 토해내는 그녀는 뒷좌석의 지나 롤랜드의 카리스마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혹시 영화를 해보지 않을래요. 얼굴도 예쁘고 택시 운전수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라며 마치 '내가 너의 구세주이다, 너는 분명 지금의 인생이 싫다'라는 확신에 찬 영화배우님의 말에 위노나 라이더는 '전 그냥 택시 운전할래요. 모든 게 내가 계획한 대로 되고 있어요'라고 쿨하게 말하며 트렁크를 닫으며 이 에피소드는 끝이 난다. 이들이 각자 집으로 호텔방으로 돌아가 다리를 뻗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식의 뻔한 엔딩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흥겨운 리듬으로 시작하는 짧은 영화를 저런 단순한 대화로 임팩트 있게 끝낼 수 있는 것이 자무쉬의 힘일 거다. 각자 잘하는 것이 분명 있다. 단편을 찍는 스콜세지는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좀 긴 서사를 가진 자무쉬의 장편 영화들에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뉴욕 편에는 드레스덴에서 온 독일 이민자가 택시기사이다. 말도 운전도 버벅된다. 뉴욕의 밤거리를 제대로 알리 없다. 결국 그보다 뉴욕 길을 훨씬 잘 아는 급한 승객이 운전대를 잡는다. 택시 여행의 절반이 뒷좌석의 여성과의 욕설로 이루어진 이 거친 택시는 낮처럼 밝은 뉴욕의 밤을 종회무진 질주한다. 그리고 택시에 가득 들어찬 감성은 오히려 옆좌석에 앉은 독일 이민자가 느끼는 평화로움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말이 오가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오롯이 마주하는 역설적 고요함 같은 것, 길 모르는 택시 운전사를 탓할 만큼 한가하지 않은 성질 급한 승객이 가끔은 조급했을 이민자에게 선사한 선물 같은 밤이다. 뉴욕이라는 배경 때문에 특히 트래비스를 자주 떠올렸다.
이 흑인 배우는 짐 자무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결국 이름은 항상 모르겠다. 파리 에피소드에서는 어쨌든 앞을 못보는 베아트리체 달의 연기를 보는 재미. 앞을 못 보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택시기사와 당당하게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답하는 여인, 어두운 센 강변에 내려 아무런 문제 없이 제 갈길을 걸어가는 여인과 곧 자동차를 들이받는 택시 운전기사 뭐 그런 에피소드이다. 그는 아마 그녀가 안전하게 잘 걸어가는지 살펴보다 사고를 냈을 거다.
헬싱키에서는 술에 잔뜩 취한 남자 승객 3명이 탄다. 새차를 뽑자마자 직장에서 해고당해 절망한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셔준 친구들이 친구의 하소연을 늘어놓자 운전기사가 그보다 더 슬픈 자기 얘기를 들려주며 모두를 울음바다에 빠뜨리는 뭔가 교과서적인 흐름이다. 사실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지속적으로 묘사하는 어둡고 침침한 핀란드의 느낌도 그렇지만 난 이렇듯 조금은 절망적이고 세기말적인 느낌의 영화 속 북유럽이 오히려 실제의 그곳과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 미디어에서 보여주며 모범사례로 삼으려는 밝고 긍정적인 전형적인 북유럽의 모습은 어쩌면 허상이라는 반사적인 반발감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다. 기후와 원초적 자연이 만들어내는 어둡고 비관적 감성들을 보완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완벽한 사회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들이 바라보는 자신도 외부세계의 그것만큼 긍정적일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나왔으니 예상할 수 있겠지만 로마편은 가장 정신없는 동시에 생기 넘친다. 이 도시에 대한 사랑,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도시 그 자체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노력한 에피소드이다. 그는 다섯 중 가장 능숙한 운전사이자 가장 밤의 도시를 즐긴다. 그는 몇 달간 말 한마디 못해 본 사람처럼 떠든다. 어린 시절 첫 자위 경험부터 시작해서 처형과 나눈 금기된 원나잇에 대한 이야기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깜깜한 로마 시내를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새벽의 도시 곳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뒷좌석의 신부에게 다가와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성전환자들, 택시기사의 듣기 민망한 고해성사까지 신부는 버겁기만 하다. 그는 지병이 있었는지 손에 겨우 덜어낸 알약이 흔들리는 택시 속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베니니의 폭풍 수다 속에서 급사한다. 급사한 신부를 거리 벤치에 앉혀놓고 그는 성급히 택시에 올라탄다. 로베르토 베니니급의 수다를 털어낼 택시기사를 만날 가능성은 로버트 드 니로의 헤어스타일과 표정을 가진 택시기사를 만날 가능성만큼 희박할 거다. 근데 있을법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내용의 수위만 다를 뿐이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신기하게도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들이 세상엔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특히나 택시처럼 아주 밀폐된 공간에서라면 조금 민망하고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낯선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느낀 상대를 오히려 연민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아주 경청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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