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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을 보고 잡담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이 황망하게 끝났다. 개인적으로는 일곱 시즌을 한 달 동안 몰아서 봤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논쟁과 예측을 거듭하며 매 시즌을 기다리던 골수팬들이 느꼈을 실망감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만든 이들의 피로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마지막 시즌은 나로서도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억지로 질질 끌고 온 드라마가 아니었기에 아마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나서 디저트를 먹듯 본 5부작짜리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 물론 디저트라고 하기에는 음울했다. 아주 탁월한 드라마였나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았고 확실히 같은 방송국의 화제 드라마의 황당한 결말로 상대적 수혜를 받은 느낌이 있지만 어쨌든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된 비극적 역사가 길고 굵은 여운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 드라마에 관해서라면 제작 단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드라마의 많은 분량, 주요 장면들이 다름 아닌 리투아니아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인이 간호원 역으로 엑스트라 출연을 하기도 했다. 체르노빌 원전과 동일한 타입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이그날리나스 원전(10년 전에 이미 가동을 멈췄다)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고 폭발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불타는 원전으로부터 날아오는 회색 방사능 재를 낭만적인 4월의 눈처럼 감상하는 역설적 장면은 카우나스의 어떤 다리 위에서 촬영되었다. 대형 주거단지 흐루쇼프카가 들어선 빌니우스의 어떤 동네는 원전 폭발로 직격탄을 맞고 가장 먼저 대피 대상이 된 동네 프리퍗으로 등장한다.

 


촬영이 한창일 때 리투아니아에선 유명 방송사의 드라마 촬영에 대한 고무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소련 시절로부터 30년이 지났는데도 30년 전 모습을 그대로 재연할 수 있는 동네에서 아직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게 뭐가 자랑스럽나'는 힐난과 푸념성 댓글이 등장하기도 했다. 수만, 수십만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그럴듯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몽땅 철거해버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소련 시절의 습관과 사고방식들은 비단 건축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 잠재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최소한 그런 사고방식의 근원과 폐혜를 안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소련 체제를 겪진 않았지만 단지 지금 그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이 드라마는 원전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니 절대 지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예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것이니 체르노빌이 탈원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드라마는 그렇다고 사건의 원인이 된 원전 자체의 기술적 결함에도 크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희생자들에 대한 감상적인 묘사도 최대한 자제했다. 오히려 폭발 이후의 아날로그적인 대처, 사건 처리에 여러 소련 국가에서 기계적으로 동원된 수십만 인력들의 해체 작업들을 담담하고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 속에서 암묵적이고도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거짓말이 비단 체르노빌 원전 비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붕괴 직전의 체제를 지탱하던 본질이었음을 보여준다. 사실을 왜곡하여 그럴듯한 다른 말로 진실인 양 포장하는 것. 그냥 침묵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의 범주에 놓일 수 있을까. 



드라마의 기본 토대가 된 벨라루스의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드라마 촬영 당시 리투아니아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다. 책은 원전사고로 피해를 본 벨라루스 시민들은 물론 당시 현직 공무원들의 인터뷰들로 구성되어있다. 원전 폭발 직후 무방비 상태로 화재 진압에 동원된 소방대원의 아내가 드라마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녀의 인터뷰가 책에는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다. (물론 가장 최초의 사망자는 폭발 현장을 원전 내에서 눈으로 목격하는 원전 직원이겠고 그들의 시체는 여전히 폐쇄된 원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20년이나 전에 쓰여진 것이다. 당시 아직 살아남아서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원전은 분명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었지만 원전 폭발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는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아닌 다름 아닌 벨라루스였다. 원전 자체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영토내에 원전 자체가 없었던 농업국가 벨라루스는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피해 국가로 남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체르노빌을 향하는 관광버스가 있겠고 원전을 뒤로한 셀피가 어딘가에 굴러다니겠지만 그 지역은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은 땅으로 남아있다. 체르노빌이라는 명칭은 러시아어로 '검은 과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지금은 어떨까.  벨라루스는 자국 최초의 원전을 세웠고 곧 가동을 앞두고 있다. 바로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국경 근처의 아스트라바라는 도시이다. 빌니우스로부터 고작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원전 폭발 시 봉쇄 구역을 최대 30 킬로미터로 지정한다고 해도 빌니우스에서는 꽤나 가까운 거리이다. 하지만 이 원전 자체는 리투아니아 내에서 생각만큼 이슈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구소련 국가들의 원전 건설에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교묘하게 국경 근처에 지어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라는 소리도 있다. 보다 용이한 전력 수출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정치적 음모이든 경제적 전략이든 진실만을 말하는 체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한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진작에 건설되었지만 몇 년 전 국민투표로 가동이 무산된 리투아니아의 또 다른 원전도 따지고 보면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있다. 타국가에 피해를 주지 않을 목적으로 원전을 내 나라 한가운데 세운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비논리적으로 들린다. 아스트라바 원전 가동을 앞두고 혹시 원전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도시의 모든 성당의 종을 울리자는 우스꽝스러운 제안을 어떤 기사에서 보았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종지기한테 연락이 닿기도 전에 인터넷이 이미 들썩할거다.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하여 요오드화칼륨을 국가적 차원에서 배급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나온다. 드라마 속에서 벨라루스의 여성 핵 물리학자는 사무실 직원에게 요오드화칼륨을 쥐어주며 최대한 빨리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방사성 요오드 흡수를 억제하는 약품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의 연구실의 방사능 측정계가 이상 수치를 보이자 연구자들은 곧바로 400킬로 남짓 떨어진 리투아니아의 이그날리나스 원전을 언급한다. 사실은 알고 보면 600킬로미터나 떨어진 체르노빌로부터 이미 신호가 온 것이다. 멀리 600킬로미터나 떨어진 연구소 창틀에 조차 몇 시간 전에 폭발한 원전이 옮겨다 놓은 방사능 먼지가 감지될 정도이고 스웨덴 어딘가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되어 소련에 진상을 요구했었던 것이라면 폭발 후의 흑연 파편으로 뒤덮인 원전 지붕의 방사능 수치는 방사능 측정계를 망가뜨리고 로봇의 작동이 중지 될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전쟁에 징집되듯 영문도 모른 채 소집되어 온 사람들은 별 볼 일 없는 작업복을 입고 옥상으로 교대로 달려 나가 삽으로 흑연 덩어리를 아래로 밀어놓고 황급히 뛰어 들어온다. 1인당 90초에서 2분가량으로 작업 시간을 제한했다는 것이 당시의 유일한 대책이자 배려였다. 



어떤 광부들은 50도가 넘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심지어 맨몸으로 굴을 팠다. 지금 그때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떤 식의 사건 처리가 이뤄질까. 기술적으로 같은 사건은 반복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만한 인력이 동원되기란 불가능한 일일 거다. 방사능 피폭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신 질환과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내 직업이 방사능 측정 기사였다면 나는 거절할 수 있었을까. 당장 주택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를 갚아야 하는 가장이었다면 특별 수당을 준다는 말에 조금은 혹하지 않았을까. 그곳이 나의 삶의 터전이었다면 쉽게 등질 수 있었을까. 체르노빌에서 대피해 온 나의 혈육을 나는 거리낌없이 집 안으로 들일 수 있었을까. 누구라도 드라마를 보고나면 나라의 엉성한 대처에 영웅심리를 가지고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게 될거다. 당장 내 집 마당의 사과를 따 먹을 수 없는 데서 오는 절망으로부터 무엇이 그들을 구원해줄 수 있었을까. 



 재미있게도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2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벨라루스 대사관이 있고 거기서 또 200미터를 걸으면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나온다. 러시아의 지배를 제외하고도 리투아니아는 이들과 이미 오래전부터 공유하고 있는 역사가 있다.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까지 확장된 시기에 그 지역을 활보했던 대공들이 세워 놓은 성채와 성벽들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친서방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왠지 여전히 러시아색이 강한 두 나라여서 인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는 피난길에 미처 데리고 오지 못한 형제자매 같은 미묘한 감정을 품게된다. 대외적으로는 발틱 3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방처럼 느껴지지만 라트비아든 에스토니아든 그 외의 구소련 국가들 국민들이 서로에 대해 '형제의 나라, 어려움을 함께 한 이웃 나라'라는 유대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종교적 구성도 역사도 판이하게 다른 이들 나라들은 왠만하면 좀 더 서유럽으로 그리고 북유럽으로의 독자적인 살길을 찾고자 알게 모르게 경쟁하며 그 어두운 과거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이 한 조국의 일원으로 어떤 강령과 부름을 그저 믿고 따라야만 했던 시기는 분명 있었다. 



드라마에서 사건 처리를 놓고 국가 우두머리들이 모여서 긴급 대책 회의를 하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서로를 동지라고 칭하는 사람들. 진실을 규명하기위해 백방으로 뛰는 학자들을 감시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 KGB 직원들,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그들에게 달리 맞설 수 없는 사람들, 보고된 사실들의 참혹함을 인지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는 크렘린 사람들이 온통 새하얀 열주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공간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 뒤편으로 아주 대조적인 핏빛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일리아 레핀의 '폭군 이반과 그의 아들 이반'이라는 그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격찬한 적이 있는 이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의 그림은 왠만해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개성있다.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 아들의 아내들을 차례로 수녀원으로 보내고 임신한 세번째 며느리마저 때려서 유산시킨 아버지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자신을 찾아 온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지팡이로 찌른다. 아들 이반은 며칠 후 사망하고 유일한 후계자였던 이반이 사망하므로써 러시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이반의 대는 끊긴다.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아들 이반을 간신히 가누고 있는 아버지 이반,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처럼 충혈되어 스스로에 대한 공포를 숨기지 않는 그의 눈빛은 한편으로는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결국 그의 선택은 같았을 거라 말하는 듯 하다. 이 그림이 실제 그 당시 그 공간에 걸려있었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드라마상의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이고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소련의 각 나라 각 지방에서 차출되어 사건 처리에 동원되었던 사람들, 그 중에는 분명 그 시기에 태어나고 자라서 믿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믿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인생은 항상 묻힌다. 스스로의 독자적인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부정하고 항상 내 개인의 인생보다는 공동체의 삶이 더 중요했으며 늘 누군가의 말을 믿고 복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기. 멀쩡해보이는 숲과 강을 잔뜩 오염시킨 방사능 물질처럼 머리 깊숙히 틀어박힌 사상으로 상장 하나와 몇푼의 상여금에 조국의 어딘가로 차출되어 희생된 사람들의 모습에 폭군 이반이 가누고 있는 핏빛 이반의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전쟁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사람들에게 그 당시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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