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Green book (2018)



요새 대성당 근처를 자주 가게되서인지 올 초에 본 이 영화가 머릿속에 계속 아른아른. 이 영화가 대성당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고 대성당 앞에 있는 KFC 때문이다. 영화 속의 우아하고 고고한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살라 알리)는 투박하고 거친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비고 모텐슨)를 통해서 KFC 라는 신세계를 알게된다. 치킨을 그냥 맨 손으로 먹는 것은 둘째치고 먹고 난 치킨뼈를 운전 중 차창 밖으로 보란듯이 내다 던지기까지 하는 토니의 행동에서 피아니스트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이동 중 차 안에서 먹는 치킨은 곧 그들의 일상이 된다. 내 원칙에 상반된다고 생각해서 뭔가를 거절해야할 것 같은 순간은 사실 많지만 딱히 그런것이 아닌데도 괜히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키게 했다거나 나의 어떤 고매한 습관을 바꿨다는 데서 얻게될 상대적 승리감에 이상한 자존심을 부려서 뭔가를 끝끝내 거부하고 싶을때가 있다. 이탈리아인 토니와 흑인 피아니스트의 여행은 두 사람 사이의 벽이 되는 그런 자존심과 원칙들이 서서히 뭉그러지는 과정과 겉보기에 확연히 대비되는 두 사람이 결국은 당시 주류 사회에 쉽게 융화되지 못하는 이탈리아 이민자와 차별받는 흑인으로서 묘한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면서 독특한 우정을 키워가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인종차별, 전쟁, 페미니즘, 실존 인물등에 관한 영화들은 이미 아카데미의 후보작 공식처럼 되어버려서 이제는 흑인 배우들이 수상하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할 정도이다. 게다가 인종 차별이 두드러진 주제인데다가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이런 영화라면 더더욱. 그런 이유로 마허살라 알리가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에 별 이견이 없지만 비고 모텐슨에게 남우주연상을 줬어야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오히려 어떤 흑인 배우가 연기했더라도 저 정도의 연기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고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캐릭터는 정말 실감났고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이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로드무비, 남자들의 이야기,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미국 사회 속의 여러 다른 이민자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어서 정말 재밌었던 영화.



비고 모텐슨은 반지의 제왕의 과묵하고 멋진 아르곤 역으로 알려진 얼굴이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칼리토에서 경찰의 앞잡이로 휠체어를 탄 채 도청장치를 끼고 알 파치노 앞에 나타나서 빌빌대다가 들키는 찌질한 역, 퍼펙트 머더의 기네스 팰트로우의 정부로 나와서 마이클 더글라스 앞에서 여지없이 깨갱된다던가 하는 역을 맡았을때가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의 그의 연기도 그랬다. 어디에 내다놔도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은 생명력, 아무런 컴플렉스 없이 스스로를 전면에 내세우는 강인함, 뒤끝없는 당돌한 자존감을 지닌 생활력있는 가장, 아내를 향한 우정과 사랑을 이토록 허심탄회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니.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등장하는 많은 옛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런 영화들하면 으례 빠지지 않는 것이 이탈리아인 특유의 식사, 파티 장면이다. 록키에서 실베스타 스탤론이 애드리안과 주정뱅이 처남, 어린 아들과 초라한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먹는 장면이라던가 심지어 대부 2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나중에 제임스 칸과 알파치노, 탈리아 샤이어 (그리고 그녀는 물론 록키의 아내 아드리안)로 자라날 아이들과 고요한 가운데 저녁을 먹는 장면등등이 그렇다. 타지에서 또 다른 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보금자리로 돌아와서의 저녁 식사는 길고 긴 하루의 종착역이다. 



 전당포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성실한 유태인 이민자들에 대한 묘사도 깨알같다. 예의상 지나가는 말로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손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채 저녁 식사에 등장하는 유태인 노부부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돈 셜리와 함께 투어를 떠나는 다른 현악기 연주자들도 알고보면 러시아 이민자들이다. 흑인들만이 머물 수 있는 호텔 리스트가 담긴 그린 북을 지닌 채 떠나는 여행이 주된 테마이긴 하지만 결국은 힘든 시기를 이겨낸 그리고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모든 이민자들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니나 시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니나에서는 정작 딸의 독주회 객석에 앉지 못하고 뒤편에 서서 구경해야 했던 부모의 모습이 그려진다. 돈 셜리 역시 사교계의 음악 파티에 초대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들을 위해 연주하지만 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고 흑인들에게 지정된 식당에 가야하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한 개인을 향한 사회적 차별이라는 것은 각자의 인생에서 떳떳한 주인이 되는 가능성을 빼앗는 폭력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들은 토니가 돈 셜리의 도움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었다. 평소에는 쓰지 않는 말투로 돈 셜리가 불러주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문장들을 받아쓰기해서 여행내내 꾸준히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는 토니, 편지를 받아 든 아내는 그것이 남편 혼자 힘으로 쓴 편지가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리지만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짓는다. 풍족하지 않은 삶 속에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상대의 노력을 알아차리는 그 순간이라는 것. 언뜻 돈 셜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그의 개인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게 하는 사회적 편견 뿐인듯하지만 그의 삶에서 결여된 것은 결국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 줄 가족 혹은 친구의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반응형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A Better life (2011)  (0) 2019.11.11
Winter sleep (2014)  (0) 2019.11.10
Greenberg (2010)  (0) 2019.11.08
HBO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을 보고 잡담  (2) 2019.07.19
Ben is back (2018)  (0) 2019.06.13
Night on earth (1991)  (0) 2019.04.19
왕좌의 게임 시즌 8을 기다리며 잡담  (0) 2019.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