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A coffee in Berlin (2012)


심플하고 깔끔하고 이런 영화는 귀여워서 그냥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지. 하루에 십분씩이라도 보면 그냥 짧은 유머를 읽은 듯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영화이다. 작년 즈음 베를린 카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흐릿해져가는 베를린의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무렵에 기적처럼 나타난 영화. 흑백 영화인데다가 제목에 커피까지 들어가니 자연스레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가 생각나지만 기본적인 컨셉은 확연히 다르다. <커피와 담배>가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커피잔들을 프레임 한 가운데에 모셔다 놓고 세상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아낌없이 허락되는 것은 커피와 담배, 수다뿐이라는 자세로 마시고 또 마시며 영양가없는 이야기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나누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그 흔한 커피 한 잔이 허락되지 않는 어느 독일 청년의 우울한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황하는 젊은 청년들의 로드 무비라는 것, 영화 전반에 걸쳐 무심하게 흐르는 재즈라든가 달콤한 낮잠이라도 한 잠 자야할 것 같은 나른함으로 충만한 도시 풍경들이 정지된 장면처럼 곳곳에 배치한 구성들은 자무쉬의 또 다른 영화 <영원한 휴가>와도 쏙 닮았다. 하지만 건방진 목소리로 당당하게 자신의 개똥철학을 피력하던 나사 풀린 방랑자, 영원한 휴가의 앨리와는 다르게 니코는 단지 무기력하며 한 방울의 유머도 없이 잔뜩 경직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커피와 담배 속의 등장인물들이 나타나서 심각한 표정의 니코의 어깨를 툭치며 좀 웃어라 라고 말하고 지나갈 것 만 같다.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 이런 베를린 풍경들이 참 좋았다. 지하철 구석구석 나뒹굴던 맥주병들, 오백년 전 것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 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던 전단 광고들. 차양없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서 데워지고 있던 태국 음식점의 칠리소스들, 뭔가 그런 풍경들을 가르고 니코들이 지나갈 것 만 같다. 베를린의 니코는 음주 운전으로 면허는 중지됐고 학교를 때려치고도 꼬박꼬박 학비를 받아온 것이 탄로나서 부모로부터의 재정적 지원도 끊긴다. 여자 친구랑도 헤어진 것 같다. 그렇다고 딱히 원망할 대상을 찾을 수도 없는 니코의 모든 불운한 개인 사정,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커피 한 잔 따위 마실 수 없는 것이 그다지 큰 불운인가도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보잘 것 없는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베를린에서 많은 커피를 즐겁게 마실 수 있었다, 생뚱맞게 나부끼던 꽃가루들과 함께 그저 따사로웠다. 그때 난 걱정이 없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걱정들은 그냥 뒤로 미뤄두고 있었던걸까. 어쩌면 그것은 카페인의 힘이었을까. 

아침 카페에 갔더니 동전이 모자라서 커피를 살 수 없고 돈을 뽑으려는데 현급 지급기가 지불불능을 선언하며 카드를 먹어버리며 어떤 식당에서는 커피 기계가 망가졌다고 하며 골프장에서 만난 아빠는 오후에 무슨 커피냐며 대신 보드카를 주문해주고 친구 따라 놀러 간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탭용 커피 주전자는 텅 비어있고 니코가 뒤를 돌아서자 마자 스탭이 새 커피 주전자를 가져다 놓는 식이며 병원의 커피 자판기는 물론 고장이 나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기 전 아주 이른 아침,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서려는 니코에게 여자 친구가 묻는다. '커피 마시고 갈래?' 니코는 그냥 나온다. 결국 그 아침 커피 한 잔을 스스로 거절한 유연하지 못함으로 그는 하루종일 커피 한 모금도 구경하지 못한다. 새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니코의 마음은 짐 상자속에 꼭꼭 닫혀있다. 니코가 지금 웃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모든 생각이 과거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결함과 불운을 대놓고 자조할 수 있을때 드디어 얻어지는 자유 같은거, 니코에게 커피 이상으로 필요한 것일거다.

이 벽화는 어디쯤이었을까. 이건 못보고 왔네. 찾아 가서 볼 날이 오겠지 베를린. 










반응형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좌의 게임 시즌 8을 기다리며 잡담  (0) 2019.04.06
Big night (1996)  (4) 2019.03.28
Supersonic (2016)  (3) 2019.03.21
Aloft (2014)  (2) 2019.03.18
바이킹스 시즌 6을 기다리며 잡담  (0) 2019.03.01
The hunt (2012)  (0) 2019.02.26
Lost in Paris (2016)  (0) 2019.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