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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10월의 토닉 에스프레소

빌니우스는 사실 그다지 작지 않지만 중앙역과 공항이 구시가에서 워낙 가까워서 구시가만 둘러보고 돌아가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겐 작고 아담하다는 인상을 준다. 중앙역에 내려 배낭을 매고 호스텔이 있던 우주피스의 언덕을 오르던 때가 떠오른다. 한때는 꾹꾹 눌러쓴 연필자국처럼 짙고 선명했던 여행의 많은 부분들은 이제 서너장 넘긴 공책 위에 남은 연필의 흔적처럼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역에 내려 처음 옮기는 발걸음과 첫 이동 루트는 한 칸 들여쓰는 일기의 시작처럼 설레이고 선명하다. 몇 일 집을 떠나 머물었던 동네는 공항가는 버스가 지나는 곳이었다. 낮동안 오히려 더 분주하게 날아다녔을 비행기이지만 막 이륙한 비행기인지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인지 그들이 내뿜는 굉음이 오히려 밤이 되어 한껏 더 자유분방해진채로 어둠을 뚫고 미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둡고 고요한 밤 집 앞의 호텔을 향해 여행자들에게 끌려나가는 캐리어의 바퀴 소리와 놀랄만치 유사했다. 허공을 가르는 비행기의 날개짓과 땅 위를 구르는 여행 가방의 바퀴소리라니 결국 목적을 가진 그것의 뿌리는 같은것일까. 새벽녘, 건물 복도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흘러나오는 딩동 소리는 밤새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뒤척이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날때즈음 착륙하기 전 마지막 기내식의 준비를 알리는 신호음과 또 비슷했다. 기내의 옅은 조명과 함께 착륙까지의 시간을 조곤조곤히 알리는 기장의 잠긴 목소리가 밤 사이의 긴 여운을 흩뜨려 버리는 그 순간 말이다. 나의 여행 그리고 누군가의 여행을 상상하는것만으로도 나는 늘상 여행의 시작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나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떠나올 수 있는 곳, 원한다면 그들을 향해 나도 떠날 수 있는 아주 멀지만 이상적인 곳에 살고 있다 느낀다. 따지고보면 모두가 그렇다. 때로는 그 물리적 거리감이 동네 어귀의 수퍼마켓을 가는 정도로 한 없이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별하고 사라져버리고 나면 마치 존재조차하지 않았던처럼 거짓같기만 한 어떤 만남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들을 위한 영원한 조력자이자 달콤한 소품, 좋아하는 공간속의 어떤 커피들. 올 해 들어 딱 두 잔의 토닉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10월의 토닉 에스프레소를 너무나 반가운 친구들과 마셨다. 이제 더 이상 이 커피는 다음 만남까지의 타임캡슐에 봉인해서 그냥 잊고 싶을만큼 더 없이 청량했던 에스프레소. 내 전화기로는 나올 수 없는 프로페셔널한 화질의 커피 풍경이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고화질로 남았으면 하는 날. 그리고 그 날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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