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 리투아니아를 여행했을 때 얼떨결에 경험했던 하지 축제의 강렬함을 기억한다. 북구의 백야까지는 아니었지만 10시가 넘어도 대낮 같은 세상은 생경했고 아름다웠다. 들판의 야생꽃들을 꺾어서 화관을 만들고 하루 온종일 그것을 쓰고 다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스름해지면 작은 초를 켜서 화관 한가운데에 놓고 강에서 흘려보낸다.
어느 해의 하지 축제때는 장작을 높게 쌓아서 태우며 돌림노래 같은 전통 민요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하듯 불 주위를 도는 행렬 속에 있었다. 불은 점점 거세지고 아래에 놓인 장작들은 점점 힘을 잃고 스러진다.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긴 시간을 지상에 남아준 태양과의 작별인사와도 같았다. 강을 따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 순 없었지만 가슴이 시렸다. 1년에 딱 한 번 아주 오래전 이들 조상들이 누리고 숭배했던 원시적 자유를 회상하는 시간. 이들이 계속 지켜나가려는 풍습이자 기억이다.
지금도 리투아니아에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수공업을 일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 장날이나 고고학 축제 같은 행사에서 그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겉모습만으로도 그들은 도시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기성복이 아닌 리넨 의상, 독특한 장신구들, 경계심 없는 표정. 자연을 곁에 두려는 인생관. 그것은 아름답다. 단 그것이 가장 옳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행복을 너무나 강렬하게 의식한 나머지 타인의 삶 속에서 불행만 인지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로의 개종이 늦었던 이교도였던 이 쪽 동네의 하지 풍습들을 알기에 사실 이 영화의 많은 요소들에 큰 거부감이나 이물감을 느끼진 못했다. 우상을 숭배하고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며 심지어 제물로 선택되었음을 발할라로 향하는 무임승차권으로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킹들의 삶 조차도 그런대로 납득이 갔었으니.
영화 속에서 90년마다 돌아오는 9일간의 이 하지 축제는 물론 그렇게 따사롭고 친절하지만은 않다. 멀쩡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스스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생을 마감하는 어떤 기괴한 의식을 시작으로 그냥 환각 버섯이나 먹으며 놀려고 온 어린 이방인들은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아주 이상한 행위들도 대다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그럴듯하게 느껴져서 은근슬쩍 동화되며 위험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내부의 엄격한 규칙과 교리들로 돌아가는 폐쇄적인 사회는 외부인들의 미심쩍은 시선을 느끼기 시작하면 폭력성을 드러내며 과격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이 공동체의 민낯을 알아차리고 벗어나려는 이들과 치부를 드러낸 사람들간의 쫓고 쫓는 싸움이 시작될까.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하여 안도감을 느끼고 모든 것은 그저 한여름밤의 악몽으로 남을까
사실 72세가 되면 이번 생에서의 순환이 끝나 스스로 마감하는 삶은 한편으로는 그럴듯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설정하고 강제하는 것도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도 결국 인간이 아닌가. 우린 항상 뭔가를 믿고 있고 우리가 믿는 것이 전부이며 바람직하다 생각해야 하며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엔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선택하는 삶조차 결국은 또 그런 믿음을 스스로와 타인에게 납득시키는 지루한 과정의 일부일뿐이다.
그런데 만약에 아직 이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도 목표도 없고 내가 그 자체로 너무나 가치있으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내 주변에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그런 거 다 포기하고 우리랑 같이 초원에서 풀 뜯어서 끓인 차 마시고 예쁜 옷 만들어 입고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라고 살갑게 말하며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 과연 이런 공동체에 내 삶을 능동적으로 맡길 수 있을까.
자극적인 스토리와는 상관없이 보는 동안 눈은 즐거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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