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하루를 끝냈다고 생각하며 차 한 잔과 함께 보는 소중한 영화 한 편. 보는 중엔 영원히 기억할 것 같은데 제목도 까먹고 내용도 까먹고 결정적으로 재밌게 본 기억을 잊는 것이 서운해서 우선 짧게라도 기록하고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일련의 영화들도 묶어서 기록해두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내가 본 영화들을 다 기록해놓을 수 있지 않으려나?)
코로나로 집안에 격리된 이탈리아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와서 저마다의 아리아를 열창하는 영상을 보고 오래 전의 이 영화가 떠올랐다. 평범하고 심심해보이기에는 이미 너무 유명해지고 바빠진 로마라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어떤 이의 삶도 그렇겠지. 너무나 평범했는데 소위 그렇게 재능을 썩히고 살기에는 너무나 비범하다는 논리로 결국 아주 바빠지고 유명해지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4개 중 감독 우디 알렌 본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속보이게 제일 재밌음. 우디 알렌의 영화 중에 속보이지 않는 영화가 어디 있겠냐마는. 여행 중에 이탈리아 남자와 사랑에 빠진 딸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상견례를 하려고 로마에 도착한 우디 알렌이 집안을 돌아다니다 파바로티급의 성량의 노랫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이탈리아인 사돈이 무려 욕실에서 샤워 커튼이 찢어져라 혼자 샤워를 하면서 부르고 있는 것. 유태인 우디 알렌은 이런 재능을 목욕탕에서 썩힐 수 없다며 업계에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미국인 사돈에게 등 떠밀려 결국 오디션을 보러 간 사돈은 웬걸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풀이 죽는다. 왜냐하면 그 실력은 혼자서 샤워를 할 때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그를 무림의 고수로 남겨두지 않는 걸까. 왜 사돈 양반은 자신의 욕실을 벗어난 것일까. 척박한 상상력을 지닌 나로써는 그 장면을 보고 정말 한참을 박장대소했다. 얇은 대나무 가지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장쯔이를 앞에 두고 뒷짐을 쥐고 그녀를 응시하는 주윤발의 온화한 미소가 생각난 것은 물론이다.
To Rome with love 에 콜걸로 등장했던 페넬로페 크루즈를 떠올리다 생각난 영화.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부부가 또 함께 나오는 스페인 영화. 이 둘이 사실상 너무 잘 어울려서 영화 속에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커플로서의 모습 조차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마을 정경, 가정집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결혼식 풍경까지 자연스럽고 발랄하게 그려진다. 그걸 보는 게 사실 가장 재밌었다. 그런데 결혼식의 흥분은 정전과 동시에 가라앉는다. 폭우가 내리고 어두컴컴한 가운데에서도 그 흥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발전기를 실어와서 전기를 돌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 하루, 사실 하루도 너무 길다. 그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것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은 것처럼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듯 자유롭다. 그들은 어찌 내가 손을 휘젓고 발끝을 디디고 서 있는 이 순간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 같다. 그것은 분명 자기 생에 대한 자존감과 연결되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살면 인생이 200도 되고 300도 된다고 생각하며 태만해지는 일분 일초를 붙들지 못해 안달하지만 사실 인생은 결국은 그 자체로 100이고 그것은 그 삶 속에서 잃고 망가지는 모든 것을 포함해서도 최종적으로 100 이므로 잃어버릴 법한 30을 위해 아무리 애를 써봤자 인생은 결코 130이 되진 않을 것이라고 그 사람들은 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엔 용기가 필요하다. 얻을 법한 것들로부터도 잃을 법한 것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 두 팔을 벌리고 제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용기. 물론 그런 느슨한 사고방식은 위기상황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생채기를 남기겠지만 과연 세상의 어떤 위험과 굴곡으로부터 우리가 절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을까.
Everybody's knows 에서 페넬로페 크루즈의 남편으로 나왔던 리카르도 다린이라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 사실 이 배우가 나오는 로베르토의 특별한 일주일이라는 아르헨티나 영화 (https://ashland11.com/700)를 관객미소로 흐뭇하게 봤던 터라 그냥 믿고 봤다. 내가 본 두 편의 정확한 아르헨티나 영화에 모두 등장했으니 아마도 아르헨티나 국민배우인 걸로. 약간 이재룡과 뱅상 카셀을 섞어놓은 듯한 얼굴이다. 대학에 입학한 외아들을 독립시키고 집안에 홀로 남은 중년 부부가 소파의 가장자리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다. 우리는 과연 사랑에 빠져있을까? 응. 널 사랑해. 아니 내 말은 나와 사랑에 빠졌냐고 라는 대화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지상의 모든 부부들에게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에 빠져있는 것과의 차이를 아느냐고 묻고 그렇지 못한 관계의 불완전함을 씁쓸하게 인지시키고 난 모르오 그것은 이미 이번 생애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하고 오리발 내미는 권태기 부부들의 관계 합리화에 폐부를 찌르려고 마구 애쓰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고리타분한 선생님들이 맨날 했던 말이 작심삼일을 반복해라 였는데 사랑에 빠지는 것도 한 사람과 계속 반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순진한 바람에 근거한 솔직한 질문을 던지고 결별이라는 결론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매즈 미켈슨의 헌터 (https://ashland11.com/793)를 연출한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또 다른 영화. 사실 여주인공 덴마크 여배우가 An expected love의 아르헨티나 여배우와 얼굴도 연기 분위기도 너무나 묘하게 닮았고 비슷한 연령대에서 위기를 겪는 부부라는 설정도 같아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부모로부터 큰 집을 물려 받은 부부가 비싼 집세도 함께 분담하고 여러 사람들과 북적되며 재밌게 살고자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이야기. 개인과 집단. 떼려야 뗄 수 없고 상호보완적인 것만 같지만 개인에게 가장 큰 생채기를 남기는 것도 집단이며 이상적인 공동체를 늘 꿈꿔야 하는 것 그 자체로 이 공동체의 생리라는 것이 얼마나 조악하고 불완전한 것인지 이 감독이 끈질기게 말하고 싶어 하는 주제 같다. 그래서 이 손바닥만 한 집단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합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의 장단점 같은 것이 날카롭게 그려질 줄 알았는데 약간 부부간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혹은 나라면 어땠을까의 심정으로 감상적으로 집중하는 바람에 영화 자체의 몰입도는 약간 헐거워진 느낌이다.
애초에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 별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남자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고 싶어하고 그런 생활 속에서 확실히 더 행복해 보이고 빛나 보이는 아내를 보며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배우자에 대한 아쉬움과 무기력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갈등의 원인에 대한 이런 서사는 다분히 남편의 입장에서 그려졌다. 그러다 그는 거침없이 구애를 해오는 제자와 사랑에 빠지고 남편이 결국 집을 나가 따로 살게 되자 아내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둘이 밖에서 살지 말고 같이 집에 들어와서 지내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구성원의 쿨한 마인드로 아내는 초반에는 그 상황을 제법 영리하게 감내한다. 어쩌면 그녀는 개인적 불행을 초월해서 공동체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스스로 총대를 맨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피해자로써의 자신의 처지를 상대적으로 부각시켜 구성원의 동의를 얻고 모든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조금 껄끄러웠겠지만 제자와 남편은 의외로 자연스레 모두의 생활 속으로 흡수되고 다른 사람들도 한 가정의 해체를 동정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점차 자유로워지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나간다.
하지만 여자는 결국 불행해진다. 그녀의 불안정한 감정상태는 다른 구성원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방해하고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의도한 그 공동체 속에서 고립되고 축출된다. 집단은 과연 궁지에 몰린 개인을 품어줄 수 있을까. 소위 사회의 안녕과 화합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낙인찍힌 개인의 부재가 공동체의 속성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가장 궁금한 것은 집을 나간 이후의 여자의 삶이 아니라 여자가 집을 나간 이후 남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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