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진영과 배우 김윤석이 감독 데뷔를 하였다고 하여 매우 궁금한 마음으로 본 두 영화 '사라진 시간'과 '미성년'. 두 영화 모두 재밌고 볼만하다. 하나는 상업 영화의 서사에 매우 충실한 영화여서 모르는 길이지만 아는 사람 손을 꽉 잡고 잘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그런 영화이고. 하나는 누군가가 정말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 해서 흥미진진하게 듣는데 다음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며 이야기를 끝맺지 못해 계속 찝찝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찝찝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사라진 시간'은 지방의 초등학교 교사와 저녁이 되면 누군가로 빙의하는 그의 아내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내의 사정이 그러하니 일부러 자진해서 사람이 적은 시골로 전근을 온 것일 텐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이 마을이 작을수록 사람들은 시시콜콜 남의 일에 관심이 많고 '이건 너만 알고 있어' 하고 말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결코 비밀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작은 마을에서라면 이웃 간의 끈끈한 정이란 것이 존재할법한데도 선생님 부부의 비밀을 알고 나서 그들을 동정하고 염려하기는커녕 겁에 질린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은 집 속에 또 다른 철문을 만들어서 밤이면 여자를 가둬놓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이나고 선생님 부부는 죽고 만다. 사건을 해결하려 온 경찰은 마을 사람들을 수사하기 시작하고 제발이 저린 주민들이 초대한 잔치에서 술을 먹고 거나하게 취한 경찰은 불난 집에서 자고 일어나니 경찰이 아닌 죽은 선생님이 되어있다. 아무도 그가 인식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는 결국 경찰이었던 그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그가 살아왔던 시간은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마주한 상태에서 어떤 삶이 그의 진짜 삶이었는지는 미궁에 빠진다.
영화를 보고 처음에는 누가 불을 질러서 사람이 죽었는지 생각하며 이 미스터리를 풀겠다고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결국 그 모든 이야기들은 순식간에 잊히고 주인공이 잃어버린 그 삶을 되찾아주고 싶은 마음에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그의 절망감에 감정이입을 하고 결국 그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꿈일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만다.
그런데 어쩌면 영화 속엔 처음부터 단 한 사람의 삶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꾼 두 개의 꿈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이 화염에 스러져가는 찰나에 회상한 자신의 과거일 수도 있으며 혹은 죽고 난 후의 그가 다시 태어난 것일 수도 있으며 한동안 사건 생각에 몰두했을 경찰이 불탄 집에서 잠이 들어 자신의 삶이 뽑혀나가는 악몽을 꾼 것일 수도 있으며 그들을 잠가 가둔 열쇠를 지닌 주민의 죄의식이 발현된 꿈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할 일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삶이 도리어 꿈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그 결말이 품은 논리에 얽매이는 것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삶과 내가 인식하는 내 삶 속의 괴리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이며 내가 나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삶 혹은 타인이 나의 인생을 이렇게 볼 것이다라고 우리가 넘겨짚으며 살아가는 삶은 내가 숨기고 싶은 나의 내면과 내가 그것을 숨기므로해서 정의되는 나의 표면적인 인생의 합이라는 것을 아주 재밌는 방식으로 장르를 눈속임하며 보여줄 뿐이다. 외진 농촌으로 시집을 왔다가 자식을 두고 떠나버린 외국인 엄마의 사진을 남몰래 사물함에서 꺼내어 보고 다시 열쇠를 잠가 가슴에 묻어야하는 어린 아이의 아픔이나 밤이면 자기도 모르게 남의 인생을 살아야만하는 기구한 사정들이 타인에 의해 넉넉하게 전부 보듬어지길 바라는 것은 어리섞은 일이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삶은 좀 쉬울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못알아보는 어이없는 상황속에서 동료 교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아픔을 지닌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자신에게 생겼음을 감지한 경찰은 마음이 편해진다.
영화를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자고 일어나 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이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며 고통스러워한다면 나는 최소한 믿어주겠다고. 그의 인생을 제자리로 돌려줄 순 없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것 만으로도 그가 새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더 행복한 삶에 도달하는 꿈 따위는 꾸지 않아도 좋지만 누군가가 꿈을 꿨는데 그 꿈속에서의 그가 내가 되어 내가 지금 사는 이 삶을 잠시라도 대신 살아가야 한다면 그가 꿈속에서나마 잠시 천국에 도달한 것처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잠에 들어 내 삶에 당도한 그가 내 삶이 지옥 같다 여겨 빨리 깨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다면 그건 그대로 그가 현실에서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겠지만.
만약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의 영화였다면 이런 식으로 끝난 영화에 화딱지가 날 수도 있고 이 결말에 얽매여서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썼을지 모르고 감독이 끝내지 못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배우 정진영이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니 왠지 너무 그답고 그가 그냥 잠꼬대하듯 던져놓은 이야기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게 무의미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아마 영화를 보는 내내 '풀잎들'이나 '클레어의 카메라'같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감독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며 봐서인지도 모르겠다. 카페에 앉아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자리를 옮겨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는 이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 이야기들 사이에 명확한 인과관계와 논리를 부여하려 그가 굳이 애쓰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진행은 굉장히 대담하고 심지어 순박한 느낌으로 충만한데 그 와중에 또 컬트적이다. 그가 두 번째 영화를 만든다면 그 영화도 재미있기를 바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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