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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장르만 로맨스

2019년 가을. 빌니우스 우주피스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는 모습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이따금 구름이 몰려오긴 했지만 9월의 날씨는 찬란했다. 만약 그날의 날씨가 가을 빌니우스의 일반적인 음울 우중충 모드였다면 엔딩에 등장하는 두 작가의 만남은 먹먹하고 무겁게 느껴졌을거다. 돌이켜보니 그날의 날씨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처음 크랭크인 할때의 가제는 입술은 안돼요 인걸로 알고 있었는데 장르만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 결과적으로는 잘 바꾼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은 어색하게 코믹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부분이 복고적이고 클래식하게 다가왔다.

배우 류승룡은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 캐릭터를 구현해내는데 탁월한 것 같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이나 '염력' 같은 작품속의 인물들이 내겐 그랬다. 작가의 친구이자 출판사 임원이며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는 역할을 맡은 김희원의 연기도 로맨틱했다. 여행 가는 길에 빼곡한 하루 일정을 프린트해서 애인에게 프레젠테이션 하는 깝깝한 순정남의 모습에 '소공녀'에서의 손까딱 안하는 가부장적 부자 남편의 모습이 겹쳐져서 혼자 웃었다. 신기한것은 상반되는 두 캐릭터에 전부 잘 어울린다는 것. 성유빈은 '살아남은 아이'를 통해 내 머릿속에 암울하고 불우한 소년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었는데 사랑에 빠진 소년의 쾌활하면서도 예민한 모습도 잘 어울렸다. 배우가 연기한 두 역할이 왠지 한 인물처럼 느껴져셔 왠지 소년이 전보다 행복해진 것 같아 내 마음이 다 편해졌다. 배우 오나라의 연기는 처음 봤는데 오묘하게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빌니우스의 촬영 부분에는 사진 속의 두 배우만이 등장해서 이 영화에 이렇게 많은 배우들과 다양한 캐릭터들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사실 요즘 많은 대작 한국 영화를 보면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좁은 지하철에서 각잡힌 코트를 입고 서로 불편하게 어깨를 부딪히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는다. 왠지 그들의 연기에 반해야만 할 것 같고 돈을 들인 만큼 잘 만들었다고 느껴야만하는 부담감에 영화 전체에 너무 힘이 들어간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이 모두 조연 같으면서도 마치 옴니버스 영화 속의 주연 같은 느낌을 주는 이런 영화들이 요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은 영화에 등장하는 세명의 작가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작은 원룸과 아파트 서재,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 그 내부 모습들에서 성공했던 작가, 침체기에 들어선 작가, 아직은 거침없고 자유분방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새내기 작가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특히 유진의 집에 등장하는 여러 커피 관련 디테일들, 유진의 과거 여행의 흔적들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집을 방문한 현의 시선과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16년 전 빌니우스에 처음 여행왔을때 내가 머물었던 숙소는 현이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는 우주피스의 천사상에서 더 높이 올라가야만 했던 곳이었다. 그 장소에서 엔딩 장면을 지켜보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돌아왔고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것이 거짓같기도 하고 또 거짓이 아니여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나에게는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는 곳. 현과 유진의 여행도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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