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마실래요?
-언제 만든 건데요?
-아침에 내렸어요.
-괜찮습니다.
택시 드라이버를 쓴 폴 슈레이더가 연출하고 오스카 아이작이 출연한 카드 카운터라는 영화를 보았다. 럼즈펠드 시절에 문제가 되었던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 관련된 구역질 나고 소름 돋는 이야기이다. 신입 고문관으로 일하던 오스카 아이작은 포로 학대와 관련해서 주요 고위 관리들이 모두 처벌을 면하는 가운데 단지 매뉴얼대로 모질게 잘 한 덕에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긴긴 수감 기간 동안 열심히 카드를 배워서 석방 후엔 나름 원칙 있고 깔끔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카지노를 떠돈다. 큰돈을 따고도 카지노의 고급 호텔에 머무르지 않고 싼 여관을 향하는 것은 카지노의 번잡함과 타락한 분위기가 수용소에서 경험한 폭력과 소음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내려진 채로 하루 종일 인덕션 위에서 탕약처럼 되어가고 있는 커피를 거절하다니 커피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공감하기도 했지만 커피맛을 따지다니 커피배가 불렀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이 장면이 참 재밌었다. 진짜 안 웃긴 영화이고 웃길 생각조차 전혀 없는 영화인데 굳이 저 항아리 같은 서버까지 클로즈업하다니 흐름상 불필요한 웃긴 장면을 넣었다고도 생각했지만 아무도 이 장면이 재밌단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도 같다.
한편으론 저 괜찮습니다 라는 대사엔 내가 잠은 여기 와서 자지만 아침에 내린 커피를 한밤중에 공짜로 준다고 좋아서 낼름 받아 마시기엔 커피 좀 마실 줄 아는 사람이야 라는 마음이 달여진 커피처럼 농축되어 있을 수도 있고 다된 밤에 커피를 마시고 낯선 여관방에서 잠 못 드는 사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될 숱한 악몽들을 예감하며 너무나 마시고 싶었던 마음을 억눌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스카 아이작은 르윈 데이비스일때 참 맛있게 커피를 마셨었지. 어쩌면 이런 독하고 암울한 영화에선 커피보단 독주를 마시는 그가 더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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