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을 지내러 갔다가 우연히 연극 한 편을 보았다. 흡연 장면도 많고 총격씬도 있어서 냄새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매케하고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옷 찾느라 줄서 있는게 싫어서 끝난 후에 최대한 끝까지 앉아 있는데 넓은 공간에서 맞이한 고요함이 뭔가 새삼스러웠다. 이 연극은 알고보니 퀜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는데 연극 제목은 Šv. speigas 였다. 영화를 봤다면 심히 납득이 되는 제목이다. 엄동설한, 동장군이라고 하면 저녁 뉴스 일기예보 느낌이 든다만 Speigas 는 어쨌든 혹한을 일컫는 말이지만 약간 미화되고 신성화된 추위의 뉘앙스가 있다. 밀폐된 공간속에서 진행되는 영화가 워낙에 연극적인 느낌이 강해서 정말 누군가가 연극으로 만들면 망설임없이 보러가겠다는 짤막한 감상을 남기기 까지 했었는데 리투아니아인이 만든 연극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영화 속에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때마다 문에 못을 새로 박아야 할 정도로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그 폐쇄된 공간 속에서 오고가는 피튀기는 대화와 액션들은 초창기 타란티노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강렬했는데 연극을 보는 동안 물론 그 긴장감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는 연극적인 요소로 충만했는데 연극은 너무 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듯하고 특히 사뮤엘 잭슨 역은 그 특유의 흑인 영어의 액센트를 리투아니아어 대사에 그대로 붙인듯 하여 한편으로는 흥미로웠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나마 브루스 던 역을 맡았던 노배우가 연기하는 부분들은 발성도 대사도 연극배우의 그것에 흡사하여 흡인력이 있었고 가장 오랫동안 뭔가 숙연한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극장 속에서 심리적으로 체감하는 추위가 나쁘지 않았다. 눈발이 휘날리지도 눈보라 음향이 있지도 않았지만 맹렬한 추위를 피해 간절한 정신 상태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야합하고 반목하며 결국 모두가 고립과 고독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가 역설적으로 추위를 극대화했다. 겨울을 불평하고 냉소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이겨내는데 타고났으며 이미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그 익숙함을 또 그럴싸한 특질로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깐 어떤 작가들, 비슷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어떤 풍경들이 그렇다. 연극을 다 보고 극장을 나서는데 연극을 보느내내 계속 겨울의 느낌에 사로잡힌 상태였었는지 아직은 밝았던 4월의 저녁이 몹시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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