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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의 테킬라.

 

 

올해 볼 연극 공연들을 예매하고 나니 지난 시즌의 테킬라들이 떠올라서 회상한다. 작년 2월에 구시가의 청년 극장에서 연극 '아연' (https://ashland.tistory.com/1258)을 봤었다. 손님이 몰리기 직전의 한산한 멕시코 식당에서 공연에 대한 설렘을 안고 간단한 타코 한 조각에 테킬라 한 잔을 마셨다. 그날의 테킬라가 진정 너무 맛있었기에 그 이후로 일종의 테킬라 한 잔의 전통이 생겼다. 어떤 테킬라를 마주하든 친구와 그날의 테킬라를 회상하고 분석하며 감탄했다.  딸려 나온 자몽에는 시나몬과 케이언페퍼를 비롯한 각종 매콤한 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호세 페르난도 알레한드로가 할머니 찬장에서 꺼내준 듯한 저 호리호리한 잔은 밀집된 향에 코를 박고 작은 양을 나눠마시기에 완벽한 구조였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건 저것이 아껴마신 단 한 잔이었다는 것. 근처 극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잔의 술기운에 매서운 2월이 너무나 따스했다. 
 


그날 마르가리타를 맛있게 마신 실행력 있는 친구는 그 이후로 바로 각종 술을 구입했다. 그리고 언젠가 나와 파블로바를 먹었던 다음날 생일을 자축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모든 술을 들고왔다. 우리는 멕시코 식당의 그것과 최대한 유사한 자몽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스트레이트로 마시지 않고 칵테일을 마시다 보니 자몽 자체도 딱히 맛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우리는 스크림 1편을 찾아보았다.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 1편을 나는 무더운 여름밤 외대 노천극장의 심야 상영회에서 보았다. 대학 축제 시즌이었는지 그냥 영화 동아리의 상영회였는지 그 해에 부기나이트도 해줘서 봤었다. 그때 야외에서 봤던 스크림은 사실 정말 무서웠는데 거의 25년이 지나서 다시 보니 그저 웃겼다. 아마 리투아니아어 더빙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친구는 재택 근무 중인 금요일 오후부터 술을 마시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할 이유를 굳이 소지하고 싶지 않다며 지난번 모든 술을 돌연 우리 집에 놔두고 돌아갔다. 얼마 후 친구가 다시 놀러 와서 어떤 관성의 힘으로 스크림 2편을 보기 시작했지만 도저히 너무 재미 없어서 그날 라이브로 방영되고 있던 유로비전 결승전을 보았다. 스웨덴 여자가 1등을 했고 덕분에 그 이후로 한 달간 식당 부엌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1위 수상곡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새벽의 문 근처에 있는 Spritus라는 곳에서 테킬라 한 잔. 사마곤(Самагон 밀주) 느낌 충만한 긴 병에 담긴 것은 사실 물이다. 백바를 구경하는 재미. 이날은 무슨 이유인지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좀비처럼 야간에 햄버거까지 먹고 킥보드를 타고 귀가했다. 러시아어 자판에 익숙해지고 이 언어를 잊어먹지 않으려고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자주 쓰려고 노력중이다.


필리에스 거리에 있는 작은 술집. 맛없는 커피, 맛없는 데킬라, 맛없는 라멘, 맛없는 케이크등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아간다.ㅋ 시나몬 스틱이 담긴 물이 결과적으로 훨씬 맛있었던 곳. 

 
 
사실 술이 반년간 우리 집에 있었지만 친구 없이 우리가 따로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줄지 않았다. 그레나딘 시럽과 오렌지 주스를 가져온 친구는 올해를 넘기지 않겠다며 이날 남은 테킬라를 드디어 집으로 가져갔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아주 급히 만나서 찾아간 동네 멕시코 식당. 늦은 시간에 식당에 가면 좋은 점이 있다. 주문 가능한 메뉴가 몇 개 없기 때문에 모든것이 분명하고 아주 간결하다. 타코 한 조각에 직원분이 추천해 주는 테킬라를 그냥 마셨다. 이곳은 저번에 라그만을 먹은 중앙아시아 식당 아랫집이다. 속에 선인장이 솟아 있는 테킬라 잔이 참 예뻤다. 크리스마스 덕담을 주고받고 마들렌 다섯 개를 친구에게 나눠주었다. 
 


크리스마스 지내러 가서 파네베지에서 마신 테킬라. 술 한 모금 마시고 쭉 들이키는 홍차가 이제 맛있다. 이 홍차는 크리스마스에 받은 산닥푸 루비라는 홍차였는데 네팔에서 밀고있는 홍차인지 실제로 이런 명칭의 홍차가 있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다. 산닥푸는 다르질링 근처에서 트렉킹으로 올랐던 지점이어서 괜히 기뻤다.  

 
 집에 혼자 남게 된 어느날, 알렉산더 페인의 신작 '홀드오버스'를 보면서 대충 섞어 주스맛이 압도적인 칵테일 한 잔을 마셨다. 페인의 명작 사이드웨이에서 와인에 절어 있던 폴 지아마티가 이 영화에서는 짐빔을 주로 마셨다. 70년대 사립 남자 기숙학교에서 크리스마스에 갈 곳이 없어 학교에 남은 남학생과 역사 선생님과 급식 담당 여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배경이 학교이다 보니 술들을 대놓고 술잔에 따라 마시지는 못하고 머그잔 이런 데다 마시는데 늘 술병이 어딘가에 새초롬하게 서있는 것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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