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이 시작되면 출산 후 남편과 함께 먹을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야지 항상 생각했었다.
아니 꿈꿨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얼마나 행복할까. 그 밥은 얼마나 맛있을까.
모든게 순조롭게 끝나고 셋이서 함께 먹는 그 밥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 될거야라고 생각하며.
새벽에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냉장고에 있던 아스파라거스를 손질해서 리조토를 끓였다.
하지만 따끈한 리조토는 산후조리용으로 냉동실로 직행했고 우선은 계획했던 메뉴중 하나인 소세지 야채 볶음을 만들기 시작.
하지만 진통은 둘째치고 잠을 자지 못해 너무 졸렸다.
그러다가 오후 4시쯤 병원에 가게 됐는데 결국은 그때까지 쏘야이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밥솥에 밥도 있었고 김도 있었고 계란 후라이만 얹어서 가져갔어도 됐을텐데 돌이켜보니 역시 그럴 정신이 없었던걸까.
아니면 점심을 먹고 배가 불렀었나.
집을 나오면서 허겁지겁 집어온 저 종이컵 위의 네덜란드 과자가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맛있는 과자였어서.
결과는 이러했다. 오후8 시쯤 아이를 낳았는데 병원에선 아무 음식도 주지 않았다.
나는 병원에서 음식을 주더라도 첫끼는 한국인들처럼 먹자는 생각으로 도시락 싸갈 생각을 했던건데
너무 늦은 밤이어서인지 아예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다.
방금 전 함께 겪은 출산을 회상하며 수다를 떠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우린 음식을 사러갈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배고픔을 느꼈을땐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병원 복도의 각종 자판기를 뒤져 초콜릿이 든 크루아상과 초코바를 간신히 구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금기 음식이네. 아이를 낳는동안 물을 2리터나 들이켰음에도 불구하고
긴 갈증후의 한 모금의 스프라이트는 정말 맛있었고 달짝찌근한 자판기 홍차 한모금에 크루아상은 녹아들어갔다.
삼풍 백화점에서 십몇칠만에 구조된 최명석군이 그랬지. 콜라가 마시고 싶어요.라고. 하핫.
아이의 생일이 되면 미역국이 아닌 스프라이트에 초코바 한사발을 대접해야할까보다.
다음날 아침부터 병실로 음식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오트밀과 간단한 빵류.
예전에 이웃집 할머니 병문안을 다니며 병원 음식을 목격했던터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감자와 밀가루가 주식이고 육류섭취가 많은 리투아니아에서 환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음식들이 제공되는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것인지도 모른다.
우유와 함께 끓여 약간의 버터를 첨가한 부드러운 오트밀과 빵 한조각에 소시지와 버터를 얹어왔다.
병원 직원들이 아주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따라 주던 차.
다양한 반찬이 곁들여진 울긋불긋한 한국의 상차림을 생각하면 몹시 초라하고 부실해보이는 식단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을 생각하면
내가 평소에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먹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도든다.
점심으로는 이런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은 내가 몹시 좋아하는 세몰리나semolina. 리투아니아어로는 manų košė
집에서도 곧 잘 끓여 먹는데 보통 우유에 걸쭉하게 끓여서 계피가루를 섞은 설탕을 뿌려서 먹는다.
버터를 얹은 빵을 또 가져다 주었다.
이것도 리투아니아에서 먹는 주요 곡물 중 하나인데 grikiai (buckwheat) ,끓인 메밀이다.
역시 버터를 넣어서 고소했다. 귀엽게도 웨하스 한 조각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버터가 저렇게 잘 발라지려면 이미 상온에 오래 놔뒀던가 아님 진짜 버터가 아닌
마가린과 버터의 중간쯤되는 약간 저렴한 버터였을거다.
이것은 식감이 보리였는데 그러고보니 리투아니아에서 먹는 곡물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쌀을 우유에 달짝찌근하게 끓여주기도 했다.
이틀째부터는 좀 더 딱딱하고 양념이 들어간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빵과 절인 비트. 매쉬 포테이토에 치킨 스튜.
딜이 뿌려진 야채 스프.
가장 맛있었던것은 아마 크루통이 얹어진 버섯 스프. 남편이 피자집에서 사온 것.
씹어 먹는 음식보다 가볍게 삼킬 수 있는 음식이 확실히 더 맛있었고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가 리투아니아에서 아이를 낳고 국립 병원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그리고 이런 식단에 아량을 베풀 수 없다면 반드시 자기 음식을 챙겨가기를.
하지만 따지고보면 전부 다이어트식에 건강식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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