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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Black field] Vardis Marinakis (2009)


 <Mavro Livadi>


단조로운 색감의 영상 속 절제 된 대사와 움직임, 내용상으로도 지루하고 불편할것 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어느 한 구석이 마음에 들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것 같은 영화들이있다. 그런 영화들은 그런 기대가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정말 보고 싶을때,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때 최적의 분위기에서 보려고 애쓰는데 이 영화가 그랬다.  잠깐 시작 부분을 봤을때 국적을 인식해 낼 수 없는 언어와 분위기만으로 얼핏 떠올랐던 영화는 <비포 더 레인> 정도. 그래서 컴퓨터 폴더속의 상업 영화들 사이에 오랫동안 남아있던 이 국적 불명의 영화를 만나러가는 느낌은 마치 마른 건어물과  군밤 냄새가 코 끝을 스치던  종로 3가의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 거리를 빠져나와  막이 내리기 일보 직전의  제3 세계 영화가 방영되고 있는 종각의 코아 아트홀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그곳의 극장가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을거라고 생각된다. 대형 멀티플렉스들이 들어섰을까. 단성사, 서울극장, 피카디리, 허리우드 까지 지하철 역에 내리기만 하면 왠만한 개봉 영화는 다 볼 수 있었던 종로판이었는데) 영화가 재미있다면 새벽이어도 정신이 번쩍 들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시 보다 잠이 들더라도 소중한 새벽을 도둑 맞았다는 박탈감이 들지 않을것이란 생각에 영화는 지난 토요일 새벽에야 드디어 육중한 폴더밖으로 빠져나왔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보다가 열번 잠이 들더라도 반드시 어두운 밤 혹은 좁은 영화관에서 숨 죽여 봐야 할 종류의 영화라는 결론이다.  낯선 언어의 리듬과 발성이 헤드폰 줄을 타고 흘러들어 귀에 꽂혔다. 등장인물들은 캄캄하고 축축한 비밀스러운 수녀원의  폐쇄된 공간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우리는 불이 다 꺼진 공간에서 간혹 몇마디를 주고 받으며 숨죽여 영화를 보았다. 



 <Mavro Livadi>

영화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서 강제적으로 개종되어 술탄의 전사, 예니체리로 살아가야했던 그리스 남자와 어렸을때 예니체리 징집을 피해 간신히 수도원에 숨겨져서 수녀로 자란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어스름한 새벽, 부상당한 병사를 태운 말이 어디론가 급히 향한다. 무언가로부터 다급히 도망치듯 달려 그들이 운명적으로 다다른곳은 수도원. 수녀들은 군대를 이탈한 병사에 관해 바로 알릴 수 있었지만 비밀에 부치고 수도원 지하에서 그를 간호하기 시작한다. 일군의 수녀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신비감을 주는 수줍음 많은 어린 수녀 안티는 간호 도중 병사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예니체리의 방 열쇠를 쥐고 있는 젊은 수녀는 예니체리와 관계를 가지고 안티와 예니체리의 감정을 눈치채고선 안티의 접근을 막는다. 수도원을 탈출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예니체리의 부탁에 안티는 방 열쇠를 빼앗아 수도원을 빠져 나오는데에 성공하지만 도주 중 예니체리는 수녀 안티가 여자가 아닌 남자임을 알게되고 거부한다. 어린 수녀 안티의 자해 장면이나 예니체리와 수녀의 정사 장면, 안티와 예니체리의 은밀한 감정적 교감 등등 궁벽한 바위 산 절벽에 위치한 고립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것이 이미 많은 금기된것들을 운명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이기에 절대 구제 받을 수 없는 일탈로 다가오지만 안티가 소녀가 아닌 소년임이 밝혀지면서부터는 그가 수도원을 빠져나온것이 단순히 병사와의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한 세상을 향한 그의 첫 발자국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Mavro Livadi>


군대와 수도원.  개개인의 특성이 억압되고 최소화된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교리와 규칙과 전술 속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가둬진 사람들의 집단. 술탄의 병사로 길러진 건장한 예니체리와 성별을 감추고 자라나야만 했던 어린 소년 안티를 중심으로 흑백에 가까운 영상 너머에 숨어있는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자신의 실체와 투쟁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예니체리와의 관계로 아이를 가진 수녀는 순종적인 안티와는 가장 대조적인 인물로 매사에 능동적이고 결단력있는 행동을 보이는데 예니체리와 관계를 맺는것은 여성으로써의 정체성과 욕망에 집착한 수녀의 의도된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예니체리와 도주한 후 잡혀서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안티를 사탄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수녀들에 맞서 끝까지 안티를 보호하려고 하는 늙은 수녀. 수도원으로 돌아온 안티가 남자인것임을 알고 자살하는 또 다른 어린 수녀. 속세의 이해관계에서 해방되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곳, 하지만 그 성스럽고 보수적인 집단을 지배하는것도 결국은 정치적인 계산들이다. 안티는 어쩌면 바깥 세상에서 수도원으로 숨겨져 들어온 아이라기보다는 할머니 수녀가 낳은 아들이 아닐까. 그가 오랜시간동안 수도원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던것은 수도원에서의 늙은 수녀의 정치적 영향력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Black filed>


섬뜩하다 싶을 장면이라면 자살한 수녀의 명복을 비는 장면에서 예니체리의 아이를 가진 수녀가 식탁에 머리를 대고 식기로 식탁을 두드리며 안티를 두둔하려는 할머니 수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반목을 도모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어쩌면 훗날 예니체리의 아이를 낳게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보호하기 위해 수도원의 질서를 자신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려는 그녀의 계산에서 비롯된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도원에서의 자신의 운명도 안전하지 못함을 직감한 안티는 또 다시 수도원에서 도망친다.


 

<Mavro Livadi>


구원을 목적으로 수도원에 흘러 들어온 그 누군도 그곳에 남지 못한다. 안티와 예니체리가 수도원에서 도망쳐 머무르는 숲속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수도원과는 다르게 세상의 온갖 초록이 집대성된 전혀 새로운 생동하는 세계이다. 비록 그들이 벼랑끝에 매달려 정처없이 헤매는 운명을 지녔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것에서 그들은 안전하지만 고인 물과 같은 수도원속에서의 인생보다 훨씬 자유롭다는것은 역설적이다. 



지리적인 배경과 종교라는것이 풍기는 유사함은 참 신기하다. 이 영화는 그리스 영화였고 시작 부분에서 머리속에 떠오른 <비포 더 레인>의 배경이 그리스에서 멀지 않은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와 오흐리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 영화속에서도 산중턱에 고고하게 세워져있는 폐쇄적인 교회를 통해 종교의 순기능보다는 그것이 야기한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묘사했었다. 두 영화의 촬영지를 언젠가 꼭 여행해보고 싶다. 특히 <black field> 속의 건축들은 이것이 과연 현세의 공간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촬영 도시만 찾아질 뿐 구체적인 수도원의 이름을 알 수가 없는데 실제로 가 볼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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