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이란 영화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키아로스타미의 코케르 트릴로지와 마지드 마지디의 〈천국의 아이들〉이 개봉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란영화는 공책, 운동화, 좁은 골목길, 언덕 위의 나무 한 그루 같은 어떤 소박한 이미지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https://ashland.tistory.com/559048 에서 아이는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온마을을 달린다. 마지드 마지디의 <천국의 아이들>에서 알리는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린 대가로 골목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공책과 신발. 너무 사소해서 이야기로 만들기조차 어려울 것 같은 소재들 (실제로 마지드 마지디는 신발 잃어버리는 이야기로 무슨 영화를 만드냐며 투자를 받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대박이 났다) 로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마지드 마지디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그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마지드 마지디의 영화는 보다 구체적인 슈제트를 좀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간다. 마지드 마지디의 영화가 자잘한 수다로 가득한 더 강한 감정 몰입을 이끌어내는 친절한 희곡이자 전원일기의 하나의 에피소드 같다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마치 <집으로>의 할머니가 평상위에 앚아서 바라볼법한 풍경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것은 그런대로 남겨두는 시에 가깝다.

이란 영화에서 아이들은 늘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공책을 돌려줘야 하고, 금붕어를 사야하고, 집을 찾아야 하고, 신발을 되찾아야 한다. 그 욕망들은 작고 개인적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별것 아닌 문제들이지만 아이들에게 그것은 하루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 된다.
알리는 여동생 자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여동생 말고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부모에게 털어놓았다면 혼나더라도 분명히 빠른 해결책이 있었을 테지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위해 어떻게든 스스로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두 아이는 하나의 운동화를 나눠 신는다. 오전 오후로 나눠진 수업 덕분에 알리는 여동생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학교로 달려간다. 잦아지는 지각으로 퇴학시킨다는 선생의 협박을 듣는 것도 빠질 수 없는 이란 영화의 디테일 중의 하나이다.

이 영화에서 마음을 붙잡는 장면 중 하나는 자흐라가 자기 신발을 신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자흐라는 그 아이를 따라간다. 아마도 신발을 돌려달라고 말해야겠단 생각을 가지고서. 소녀의 집앞에 도착했을때 자흐라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아버지를 본다. 소녀의 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자흐라는 조용히 발길을 돌린다.
이란 영화에는 유난히 앞을 보지 못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천국의 아이들>의 시각 장애인 아버지, <하얀 풍선> https://ashland.tistory.com/559049 의 껌 장수. 크게 중요치 않은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영화들의 도덕 구조를 떠받치는 핵심 장치다. <하얀 풍선>에서 창살 밑으로 떨어진 돈을 꺼내기 위해 아이들은 껌을 생각해낸다. 라지에의 오빠는 돈이 없지만 껌을 파는 맹인이 있는 곳을 향한다. 소년은 마음만 먹으면 돈을 내지 않고 껌 하나를 슬쩍할 수 있었지만 결국 발을 돌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가장 쉽게 속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니 한편으론 어린이보다 더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이다. 이란 영화는 그들을 의도적으로 화면으로 끌어온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 앞으로 데리고 와서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 아이를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언제나 옳은 쪽을 택한다. 인간의 선함은 감시 속에서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드러난다는 믿음. 종교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윤리다.
자흐라의 신발이 더 불우한 사람의 손에 들어간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아이의 태도다. 그는 자신의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편을 택한다.

알리와 자흐라의 아버지(레자 나지) 역시 이 선함의 연장선에 있다. 그에게 부업거리가 생긴다. 모스크에서 바위만한 설탕 덩어리를 가져와서 집에서 망치로 잘게 부수는 것이다. 정작 집에는 차에 넣을 설탕이 없다. 하지만 그는 차 한잔에 넣었어도 아무도 눈치채지못할 설탕을 결국 취하지 않는다.
많은 이란 영화에서 아버지는 엄격하거나 침묵하거나 무력하다. 가난은 종종 체념이나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의 아버지는 조금 다르다. 이것이 아마 마지드 마지디가 이란에서 좀 더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유중 하나일 거다. 그는 가난하지만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레자 나지가 연기한 아빠는 도시로 나가 일거리를 찾고, 자식들의 작은 소망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 겉으로는 툭툭거리고, 불평이 많고, 무뚝뚝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믿음직한 아빠가 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달리기 대회다. 알리는 3등 상품이 운동화라는 사실을 알고 참가한다. 목표는 승리가 아니라 신발이다. 그러나 그는 실수로 1등을 해버린다. 모두가 환호하는 순간, 알리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실패한 사람처럼 운다. 성공은 언제나 축복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 순간 이 아이에게 성공은 좌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리는 마당의 연못에 발을 담근다. 벗겨진 발가락, 상처 난 살갗 위로 물이 흐른다. 그 장면은 묘하게 평화롭다. 그리고 아빠는 여동생의 신발을 사가지고 귀가한다.

기적이 일어나진 않는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들만 보여준다. 낡은 운동화, 먼지 쌓인 골목, 땀에 젖은 아이들의 얼굴만 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그들을 ‘천국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고, 가난은 여전히 잔인하지만 마음 한편은 따스해진다. 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고. 그것은 신발을 포기하는 아이의 등 뒤에, 달콤한 차 한잔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설탕을 부수는 아버지의 손에, 간절하게 달렸던 알리의 발 아래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 이미 한 번 그곳에 닿았던 적이 있을 거다. 우리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순간, 우리의 욕망이 우리 자신을 넘어 타인을 해치지 않는 순간, 가난 속에서도 존엄이 유지되는 순간이 아마 천국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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