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취남'이라는 채널을 가끔 본다. 남의 집 구경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에겐 참 다양한 것들이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은 재밌다. 며칠 전엔 달리기를 하는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직장인일 때는 회사까지 뛰어서 출근했고 빵집에 갈 때도 몇 킬로 정도는 그냥 뛰어간다고 했다.
신발장을 열어 달리기용 운동화를 보여주는 여성을 보는 순간 <아워 바디>의 '자영'이 생각났다. 꽤 오래전 영화인데 그때부터 이미 달리기 붐이 일었던 건가? 이 영화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나는 달린다', '위 런' 같은 택도 없는 제목으로 검색하다 겨우 찾았다. 배우 이름을 검색했으면 됐을 텐데 왠지 기억해내고 싶었던 제목. 어쩌면 제목이 주는 울림이 더 컸던 영화.
명문대를 나와서 자취를 하며 수년간 행시 준비를 하는 31살 고시생 자영(최희서), 엄마에게 실토한다.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그것은 올해 보지 않은 시험에 대한 것이라기보단 이제 고시 공부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하는 것은 희망일거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결국 목표를 이루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검은 우물 같은 희망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간혹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근거 없는 고집에 불과한지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이십대를 고시서적에 파묻혀서 삼십을 넘긴 자영은 그런 의미에서 이대로 살 순 없다고 생각한다. 집세를 내주며 딸 뒷바라지를 하던 엄마의 속마음도 아마 같았을 거다. 자영은 터덜터덜 맥주를 사가지고 동네 계단에 앉아 있다가 달리는 여자를 본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을 자영은 그를 만난다. 실재하는 인물인가? 그것은 마치 환영 같다. 분명히 있다고 믿고 싶은 신화, 우리가 결국 다른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존재, 현주(안지혜)이다.

달리기는 자영의 일상이 되어 활력을 불어넣고 현주와도 가까워진다. 현주는 자영에 대해서 거의 묻지 않지만 자영은 현주를 좀 더 알고 싶다. 가벼워 보이는 몸, 아무리 달려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표정, 직장인,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집, 적당한 미소, 취미로 만든다는 술, 책을 쓰고 싶다는 꿈. 같은 또래지만 현주는 자영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더 많은 삶을 살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 자영이 현주에게서 발견하고 싶은 모습이자 자신도 갖고 싶은 모습이다. 삶은 노력하는 대로 바뀌고 성취되는 존재라는 것을 자영은 현주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러던 현주가 사고로 죽는다. 현주가 없는 집에서 현주가 만든 술을 마시고 출판되지 않은 현주의 글을 읽으면서 자영은 현주를 회상한다. 달리던 현주는 사실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현주는 통제가능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보고자 했던 결실은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 자신의 탓은 아니다. 사고였고 시간이 더 많았다면 결국 그 목표에 닿았는지도 모른다.
자영은 친구가 일하는 회사에 알바로 들어간다. 일일 알바에서 정식 인턴이 되어 늦게까지 남아 일하던 날, 상사와 술을 마시고 충동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어쩌다 소문이 난다. 아마도 정직원에 뽑히려고 상사와 잤다는 뉘앙스의 뻔한 소문이었을 거다. 자영은 자기 몸만 뽐내려고 하는 젊은 남자보다는 서른 살은 많은 남자와 자보고 싶다는 죽은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대신 실현했고 자영이 건강해 보인다고 칭찬하는 상사를 제 자신의 몸으로 능동적으로 탐닉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자영을 쓸모있기위해 자신의 몸을 쓰는 사람으로 오해한다. 그리고 자영은 컴퓨터를 리셋하고 회사를 나온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저마다의 능력이 다르다. 그런데 부족한 능력은 노력으로 채울 수 있다고 한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자존감 문제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도 비교적 어느 정도는 쓸모 있고 자기 구실을 해서 결국 유용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러니 결국 내 몸뚱이는 나만을 위한 몸은 아니다. 꼭 남보기에 매력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몸이라면 아마 남보기에도 창피한 몸은 아닐 거다. 내 몸이라서 내 마음대로 한다는 사고방식은 세상의 입장에선 굉장한 이기심이자 방종이다. 그러니 각자가 자기의 몸을 통제하도록 하는 매커니즘이 만들어진다.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쓰러질 것 같은 구축 건물이 재건축 대상이 되듯, 각자의 몸을 재건축하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말한다. 자기 관리와 통제는 어느새 사회적 의무가 된다. 몸은 대체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쏟아부은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믿음, 자기 몸을 제대로 알고 정복할 수 있다면 뭘 해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넌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화.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신화를 증명하고 달리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려는 영화는 확실히 아니다. 그랬다면 책을 내고 싶었던 현주가 출판사 미팅을 끝내고 좌절하는 표정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쓸모 있음의 정의와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것만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자영은 고시에 연거푸 떨어지는 자신보다는 아마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회적 자아로써 실망한다. 그리고 알바를 하고 인턴이 되고 정직원이 되어 사람구실을 해보는 실험을 하는 동시에 달리기라는 실험을 한다. 자영은 잃어버린 건 사회적 쓸모없음이 아니라 자기 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영을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현주는 그 도시를 달리는 수많은 길 잃은 혼에 가깝다. 텅 빈 집. 알 수 없는 표정. 그가 실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은 그가 담근 술이나 그가 쓴 글, 그가 달려낸 거리일 뿐이다. 짐짓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기 것에 몰두하는 듯 보이지만 현주는 그 실체 없는 노력에 사실 이미 지쳤고 피곤하다. 자영이 그런 현주를 알아챘을 때 현주는 사라지고 자영은 자기 앞으로 돌아온다. 현주의 죽음을 통해서 자영이 현주와는 다른 의미로 달렸을 거라 믿고 싶다.
삶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저 즐기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다. (우디알렌 영화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ㅋㅋ.. 이런말은 보통 대충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내뱉지만 실상 그들은 매우 진지하다.) 달리기도 그런 맥락에서 삶의 무의미함을 그런대로 긍정하고 즐기는 방식의 하나일거다. 달리기는 뭔가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선전이자 이념이다. 그런 관점에서 달리기를 보면 달리기는 나에게 너무 지나친 절대선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야 했던 크리스마스 씰 같다. 달리기는 나에게 그것에서 의미를 찾기엔 너무나 풍족한 행위이다. 땀에 뒤범벅되어 자신의 가장 밑바닥을 극복하고 다시 가장 높은 정신적 만족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나에겐 경험하고 싶지 않은 허영이다. 이것은 분명 달려보지 않은 자가 내뱉는 의심과 냉소와 허무이다. 그래서 난 아마 영원히 달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기에 매달리는 의지 자체에는 매료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미 그런 의지를 실현하고 있다. 나는 자영이 그저 그런 수단으로 달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자영과 현주가 성적 판타지에 대해 얘기할 때 자영은 비싼 호텔에서 해보고 싶다는 소릴 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자영은 실제로 호텔에 있다. 룸서비스로 햄버거를 먹고 스스로를 탐닉한다. 그 순간 자영은 고시 문제집이 펼쳐져있는 원룸 방바닥에서 전 남자 친구의 허기를 달래주는 수동적인 몸의 자신 보다, 지금의 자신이 훨씬 가치 있다고 느꼈을 거다. 그 반짝이는 감각은 많은 것을 희생하한자만이 느낄 수 있는 성취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더 정돈된 공간, 더 아름다운 배경, 더 탄탄하고 향기 나는 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좀 더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하지만 그 외형과 내면, 나라는 본질과 일치한다고 무엇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자영이 자기 몸을 능동적으로 바라보며 자기 몸의 주체가 됐다라는 맥락에서는 좋은 엔딩이지만 동시에 너무 친절한 설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앞선 서사만으로도 충분했고 없어도 좋았을 장면이다.
그럭저럭 내 몸뚱이로 여전히 제자리 뛰기하며 살아가는 오늘, 그래서 롤라는 왜 뛰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며.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 Bag of Rice (1996) (0) | 2026.02.04 |
|---|---|
| The Mirror (1997) (0) | 2026.02.03 |
| Pieces of a Woman (2020) (0) | 2026.02.02 |
| White Material (2009) (0) | 2026.02.01 |
| Lamb (2021) - 아이슬란드 양(羊)영화 2 (0) | 2026.01.30 |
| Oslo, August 31st (2011) (0) | 2026.01.23 |
| Bashu,the Little Stranger (1986) (0) | 202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