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핀란드 여인 이리스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산다. 다 마시고 세척한 것으로 보이는 보드카병이 물병과 꽃병으로 변신하여 여기저기 널려있고 의미 있는 말 한마디 오고 가지 않는 그 차가운 집안을 채우는 것은 긴박한 국제뉴스들이다. 러시아에선 가스 폭발로 열차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죽고 이란에선 이슬람 지도자가 죽고 천안문 사태로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이 죽는 뉴스들이 계속 흘러나오지만 원한다면 그 티브이를 꺼버릴 수 있는 이쪽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다. 세상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과는 상관없이 이리스의 일상은 표면적으론 평화로워 보인다. 공장에서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저녁이면 퇴근해서 모두를 위한 밥상을 차리고 자기 전에 대중 소설을 읽고 주말이면 댄스장에 가서 남자를 기다린다. 쓸쓸하고 생명력 없는 삶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반대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며 이런 삶과는 적당히 타협하는 게 옳은 걸까.
월급을 받은 이리스는 예쁜 원피스를 사고 남은 월급을 부모에게 가져다주지만 평소보다 작은 액수를 의아해하는 부모에게 원피스를 보여주자마자 따귀를 얻어맞는다. 댄스홀에서 늘 남자들에게 외면받던 이리스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술집에 가고 거기서 만나 하룻밤을 보낸 남자의 아이를 가진다. 너와 함께 아이를 잘 키워보고 싶다는 순진무구하고도 진심 어린 장문의 편지를 그에게 직접 전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애라는 한 문장과 낙태 비용. 이리스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약국에 가서 쥐약을 산다. 안돼, 그렇다고 죽겠단 생각을 할 필요 까진 없잖아 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이리스는 쥐약을 탄 물병을 가방에 넣고 돌아다니며 자기 삶의 불청객들을 한 명씩 처리한다. 임신시킨 남자의 집을 찾아가서 술잔에 붓고 술집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미소로 응대한 후 그의 맥주잔에 붓고 엄마 아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고 그들의 물컵에도 붓는다. 그리고 얼마 후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출근해서 일하는 이리스의 성냥공장으로 경찰이 찾아온다. 이리스는 성냥공장에서도 나쁜 남자들에게서도 부모에게서도 그렇게 드디어 해방된다.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잡혀가는 이리스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오히려 그녀가 느꼈을 해방감을 전달받는다. 이리스 개인의 인생에서 그것은 가스 폭발로 탈선하는 열차 이상의 전복이자 폭거에 대항하는 비무장 시위와 다름없다. 같은 주제를 아스가르 파르하디나 김기덕 같은 감독이 다뤘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너무 사실적이고 비참하고 끔찍하게 주인공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을거다. 그나마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특유의 톤과 카티 오우티넨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이것이 명백히 블랙 코미디이며 왠지 현실에선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볼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을 쥐약을 먹여 죽이는 이리스는 단순히 개인적 분노를 표출했다기 보다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과 부당함을 직접 징벌한다. 물론 이리스의 행동을 마치 도덕적인 복수의 완성처럼 느끼는것도 부당하며 법적으로는 명백한 범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리스가 처단한 대상들은 법으로는 규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엄마 아빠는 딸의 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덕에 좀 편안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며 남자들은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여자의 진심을 이용할 뿐이다. 좋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일까 생각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결국 이리스에게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법적 체계는 이들의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고 한 인간이 그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단했을 때의 처벌은 온전히 이리스 그 자신의 것이 된다.
쥐약으로 자신을 착취했던 사람들을 해하는 핀란드 여인 이리스의 얼굴에서 계단에 굴러 아이를 유산하고 쥐약으로 복수하는 한국인 <하녀>를 본다. 그리고 강간당하고 자살한 친구를 대신해서 나쁜 남자들을 처단하고 자기도 희생하는 길을 택하는 21세기 <프라미싱 영 우먼> 속의 캐시의 얼굴도 본다. 물론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핀란드의 산업역군에게서 전도유망한 여성의 얼굴을 찾기란 힘들다. 그곳엔 오히려 이미 뼛속부터 착취당하는 그 시대의 여자와 프롤레타리아의 인상만이 흥건 하다. 그리고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에게 분노를 배제하고 희망의 감정을 담아 차근차근 편지를 적어내려가는 책 읽기 좋아하는 이리스의 문장력과 순박함에서 여자라고 부모에게 구박받고 공장에서 일하는 틈틈이 신춘문예당선을 꿈꾸던 후남이를 떠올린다. 왜 그때 그녀에게 집적되던 그 남자 탤런트의 얼굴이 여전히 생각나는 걸까.

이 영화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완결이자 내 개인적으로 분류하기를 카티 오우티넨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타티야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 https://ashland.tistory.com/m/559083 처럼 마냥 발랄하지 않은 영화이고 제목만 들어도 이미 주인공의 암울한 삶이 느껴지지만 그 틈에도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냉소와 유머는 빠지지 않는다. 이 영화 속의 이리스가 매정한 부모에게서 독립해서 그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들도 보란 듯이 무시하며 당당하게 잘 살아가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두 영화 속에서 카티 오우티넨을 좋아하고 그 마음을 보여주는 것에도 세심함을 기울였던 마티 펠론파 같은 남자 캐릭터가 이 영화에도 등장하기를 바랐던 것은 일종의 모순이면서도 참 포기하기 힘든 감정이다. 그래서 아마 결국 함께 남기를 선택하던 레이노와 타티야나의 뒷모습이 그토록 따뜻해 보였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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