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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천국의 그림자 (1986)

 
 

 
 
헬싱키 어딘가. 잔잔한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과 함께 니칸더(마티 펠론파)의 일상이 그려진다. 니칸더는 쓰레기 처리 업체에서 일한다. 그날의 할당된 쓰레기 컨테이너들을 하나둘 비우고 포화 상태가 된 쓰레기 수거 차량을 매립지에서 비우면 하루가 끝난다. 니칸더의 일상은 건전하다. 퇴근 후 간단히 장을 보고 영어 학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제법 정성스레 저녁을 해 먹고 간이 나빠서 도수 높은 술은 안 마신다. 어느 날, 라벨도 안 붙여진 시너병 같은 보드카 병을 들고 코가 빨개진 니칸더의 동료가 다가와서 말한다. 마치 25년 동안 매일 아침 했던 생각이지만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그간의 인생을 전복하겠다는 듯이. 은행 대출을 끼고 트럭 5대를 사서 자기 사업을 시작할 테니 합류하라고. 니칸더는 순간 조금 머뭇하지만 그 자신의 인생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준적극성을 발휘하며 동료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료는 얼마 후 평소처럼 컨테이너를 비우다 쓰러지고 심장마비로 죽는다.
 
늘 마지막 열쇠를 돌리지 않아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인가라는 의문을 품으며 결국 열쇠를 돌리고선 좌절하던 슬픈 사람들을 코엔 형제의 영화 속에서 많이 봤다. 나름 합리적이라는 그들의 착각이 빚어낸 충동적이고도 급진적인 인생 항로 변경은 늘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며 비극적으로 끝나곤 했다. 하지만 니칸더의 동료는 열쇠를 돌리기도 전에 허망하게 죽는다.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지조차 못한 니칸더 역시 좌절하고 술을 마시고 깽판을 부리다 구류를 살고 감방에서 무직자 멜라르틴(사카리 쿠오스마넨)을 만난다. 그리고 동료를 잃은 니칸더의 제안으로 그들은 다시 월급의 달콤함을 공유하는 쓰레기 수거 업체의 동료가 된다. 
 

 
 
일로나(카티 오우티넨)는 슈퍼마켓에서 일한다. 손을 다친 채 장을 보러 온 니칸더에게 반창고를 붙여주다 둘은 눈이 맞고 뒷문에서 담배를 피우다 '늘 누가 우리 쓰레기를 치워가는지 궁금했어' '그게 바로 나였지'라는 로맨틱한 대화 끝에 그들은 데이트를 하게 된다. 이들은 숫자를 부르는 게임 진행자의 나른한 목소리만이 허공에서 울려대는 빙고게임장을 향한다. 첫 데이트에서 시빌 셰퍼드를 데리고 3류 포르노 극장에 가는 <택시 드라이버>의 과감한 로버트 드니로를 생각하면 니칸더의 건전함과 진솔함은 하늘을 찌르지만 일로나는 좀처럼 니칸더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은 꽃까지 뿌리치고 게임장을 나온다. 니칸더는 뭘 잘못했고 일로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일로나의 상사는 경쟁업체의 선전과 마진 구조에 대한 설명을 케인즈처럼 간곡하게 늘어놓고 일로나는 슈퍼마켓에서 해고당한다. 왜 무수한 직원들 중 굳이 일로나가 해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간중간 담배를 너무 많이 펴서 혹은 잘 웃지 않아서. 그 길로 슈퍼마켓을 나온 일로나는 니칸더와 만난다.

'올해만 세 번째 해고야. 여행을 떠나자.' 돈이 없는 그들은 멜라르틴 집으로 여행비를 꾸러 가고 니칸더의 행복을 염원하며 그 자신도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선량한 멜라르틴은 부인과의 진지한 상의 끝에 잠들어있는 딸아이의 돼지 저금통을 황급히 뜯는다. 밤의 도시를 질주하는 차량은 개인 비행기처럼 날듯이 가벼워 보이고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은 늘 낭만적이고.
 
하지만 이들의 연애는 좀처럼 발전되지 않는다. 모든 기회를 가졌지만 니칸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일로나는 니칸더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오기만을 바란다. 니칸더의 어리숙함에 일로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새직장인 옷가게 사장은 일로나에게 집적거린다. 하지만 일로나는 이미 니칸더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왔고 그들은 결국 멜라르틴이 운전하는 쓰레기 수거 차량을 타고 항구로 향한다. 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탈린행 페리를 타기 위해서. 
 

 
 
이 영화는 시기상으로는 더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나에겐 <천국보다 낯선>의 프리퀄처럼 느껴질 만큼 일로나와 에바는 닮은 구석이 많다. 뉴욕에 도착하기 전 헝가리에서의 에바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어쩌면 헬싱키에서의 일로나의 삶과 비슷했을지 모른다며 상상한다. 일로나는 언젠가 플로리다에 가고 싶었지만 비행기를 놓쳤다. 그리고 집을 나와 갈 곳이 없어진 일로나는 카세트를 들고 니칸더의 집을 찾아온다. 아직 소녀 같은 말간 일로나의 얼굴에서 '지금 서있는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마음을 품은 채 헝가리를 떠나와 카세트를 켠 채 황량한 뉴욕을 걷는 에바를 본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도시는 늘 차갑고 쓸쓸하다. 정리된 도로들과 따뜻한 조명을 내뿜는 그럴듯한 건물들이 늘어선 멋진 도시의 모습이 이따금 화면에 잡히지만 대부분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도시의 뒷공간을 구석구석을 비춘다. 그 도시에 부유하는 사람들은 서로 살갑게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늘 외롭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늘 나 아닌 누군가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주길 바라며 결국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또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고만고만한 처지의 사람들은 간혹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경험하겠다는 소극적인 시도를 하지만 결코 인생에 큰 흠집을 남기지 않는 실패를 맛보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들이 체감하는 결핍이란 것은 그저 그들 각자가 생각하는 기준의 풍족함에 늘 미달되는 정도의 결핍 그 이상은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닿지 못할 부유한 삶을 향한 부질없는 염원도 아니고 영영 헤어나지 못할 절대적인 빈곤이 빚어내는 절망도 아니다, 그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과거를 같은 시선에서 비교적 동등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그들은 대체로 서로 의지하려고 하고 카우리스마키는 보통 욕심 없이 아주 평범한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아주 가까운 곳에 놔두고 어떻게 하나 지켜본다. 인생은 머뭇거리기엔 너무 짧다며. 우리에게 고통만 주고 우리 전부를 삼켜버릴 것 같은 그림자로 차곡차곡 채워진 이 삶 속에서 같이 서서 버틸 수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그 삶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겠냐며 서로를 토닥이는 인물들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오해하고 적극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가 날리는 유머들은 보통은 어처구니없지만 따뜻하다. 비극과 가능성은 늘 함께 존재하고 어떤 캐릭터도 완전히 영적이거나 완전히 세속적이지 않다. 내일이면 날씨가 바뀌고 내일이면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현실에 실망하지 않고 견디는 법을 아는 이들은 엄밀히 말해서 낙관주의자들은 아니다. 이왕 이런 삶에 내던져졌다면 함께 이 비극을 자조하며 웃을 사람을 찾아 나선 사람들인 게 맞다.
 
니칸더는 혼자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험난하다는 결정적인 말로 일로나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그것은 여자로서 일로나의 삶이 힘들 거라는 소리보다는 니칸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시선에 가깝다. 그리고 영화 속에선 늘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서정적인 대중가요의 가사는 늘 슬프다. 삶은 간혹 작고도 구질구질한 타협을 요구한다. 다짜고짜 담배를 달라고 손찌검을 하는 사람들에게 순순히 담배를 주면 수월해질 삶이란 것을 알면서도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아 버티고 싶은 순간이 있고 해고 통보를 하는 상사에게 불우한 사정을 늘어놓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봐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왠지 이 삶이 전혀 나빠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순간을 이들은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카티 오우티넨이 출연한 첫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이다. 카티 오우티넨이 정말 싱그럽고 예쁘다. 인간의 신체적 나이라는 것은 선천적인 외모의 훌륭함과 연륜이 만들어내는 우아함과는 상관없이 절대적이고 기적적인 뭔가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가 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에서 일로나는 이리스를 거쳐 타티야나에 안착한다. 일로나가 니칸더와 호기롭게 떠났던 곳으로 타티야나와 레이노는 다시 떠난다. 그리고 마티 펠론파는 안타깝게도 1994년 심장마비로 죽는다. <타티야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 https://ashland.tistory.com/559083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찍은 마티 펠론파의 마지막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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