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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타티야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 (1994)

 
 
독서에 침대용책과 화장실용 책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도 프로젝터용 영화와 식사용 영화가 있다... 어떤 영화를 식사용 영화로 분류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한 영화에 던지는 최대의 찬사이자 가장 진솔한 우정의 표시 같은 게 아니려나. 짐 자무쉬, 아키 카우리스마키, 홍상수, 오즈 야스지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고 그 외에도 무수한 영화들이 있다.

식사용 영화 클럽에 들어오는 기준은 사실 간단한 듯 간단치 않다. 또 봐도 재밌다는 게 소름 끼칠 만큼 여러 번 본 영화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플롯이 단순하고 대사가 적고 흑백이면 더 좋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해선 안되며 주인공들의 은근한 속웃음과 수줍은 좌절감 같은 게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면 미련 없이 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15분 정도면 된다. 지나가다 만난 친구와 근황을 나누고 헤어지는 속도면 딱 정확하다.

사실 일일시트콤만큼 삶의 역설을 임팩트 있게 전달하는 장르는 없다. 그러니 긴 장편영화를 인위적으로 끊어보는 와중에도 매번 훅 들어오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항상 놀랍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인물이 남지 않으면 식사용 영화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식사용 영화 한 편을 찬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다. 좋아하는 영화를 전부 연결하고 싶은 사람은 또 억지를 부리며 이 영화를 <가솔린 레인보우> https://ashland.tistory.com/559079 와 <그린카드>  http://ashland.tistory.com/559082 옆에 이어 붙인다. 오레곤 청소년 다섯 명이 봉고를 타고 바다를 보러 떠난 것처럼 핀란드인 레이노와 발토도 바다로 향한다. 모카 포트대신 우체국에서 수령한 차량용 커피 메이커를 대동하고 무한 희석되어 전혀 기능하지 않는 카페인과 무색무취의 보드카가 출렁거리고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여행을 떠난다. 방금 고친 쌔삥한 볼가에 생전 처음 보는 에스토니아 여자 타티야나와 러시아 여자 클라브디아를 태우고 탈린행 페리가 출발하는 항구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 이 영화가 들어가는진 모르겠다. 이 감독 영화에 프롤레타리아가 주인공이 아닌 영화가 어디에 있다고 무슨 기준으로 어떤 영화를 3부작으로 묶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어쩌면 아키 카우리스마키 초기작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카티 오우티넨 3부작으로 부르고 싶다. <천국 속의 그림자 Shadows in Paradise>의 일로나에서 <성냥 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의 이리스 그리고 이 영화의 타티야나까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영화들이자 명작이다. 
 
짐짓 록커를 꿈꾸는듯한 외모로 단장한 발토(마토 발토넨)는 섬세한 재봉틀 숙련자이다. 엄마의 철저한 감독 아래 미싱질에 여념이 없다. 엄마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고 머리를 대차게 얻어맞고 집에 커피조차 떨어지자 발토는 엄마를 방에 걸어 잠그고 집을 나선다. 우체국에서 커피 메이커를 수령하고 자동차 정비공 레이노(마티 펠론파)에게 맡겨둔 볼가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 둘은 그 길로 여행을 떠난다.

발토는 운전을 해야 하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엄청난 커피 중독자라서 커피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이노는 보드카만 주야장천 마신다. 그러다가 고속버스 타이어가 얼어 발이 묶인 클라브디아와 타티야나를 만난다. 탈린으로 가는 페리를 타야 하는 이들은 항구까지 태워달라며 레이노와 발토에게 접근한다. 타티야나는 그나마 핀란드어를 조금 할 수 있지만 이들은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 러시아인 클라브디아는 이 남자들이 그럴듯하게 말도 좀 걸고 레스토랑에서 돈도 팍팍 쓰며 마치 오늘이 3월 8일 당일인 것처럼 대해주기를 원하지만 여인들은 야외에서 펄펄 끓는 냄비에 감자를 잘라 넣으며 콜호즈에서 감자풍년이 났던 어떤 따스한 해를 회상할 뿐이다. 그래도 레이노는 간혹 의미심장한 농담을 갈기는데 타티야나는 레이노의 유머를 이해하고 키득거린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항구에 다다른다.

이들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듯 보이지만 페리에서 다시 만난다. 탈린에 내린 클라브디아는 러시아행 기차를 타고 레이노는 타티야나와 그 무뚝뚝함 속에서도 사랑의 결실을 맺어 함께 탈린에 남는다. 발토는 혼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방문을 열어 엄마를 꺼내주고 담배를 꼬나문 채 이어서 미싱을 돌린다. 발토는 그토록 인색하게 대했던 클라브디아에게 작별 선물로 전동커피밀을 받는다. 터보 엔진을 단 듯 힘차게 돌아가는 커피밀소리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이 울린다. 

 

 
 
초기 짐 자무쉬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유사성에 대해 말해서 뭐 하리. 상대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고 마티 펠론파가 아예 볼가의 운전대를 잡은 <지상의 밤>https://ashland.tistory.com/810에서의 핀란드 편은 거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위한 헌정 영화에 가깝다.  <커피 앤 시가렛>은 어쩌면 극단적인 커피 러버 발토가 원형인 영화이다. <타티야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는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과 <영원한 휴가>의 믹스테잎에 가깝다. 재즈 대신 록음악과 러시아 가요가 있고 헝가리 이민자 에바와 윌리의 영어대신 '뚜르륵똑뛰'하는 핀란드어가 있을 뿐이다.  

돈을 벌러 타국에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민자 여인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는 부단한 생을 느끼게 하지만 순간순간 수동 카메라를 꺼내 들고 지극히 일상적인 피사체를 향해 다가가는 타티야나는 카티 오우티넨 3부작 속의 여인들 중에서 가장 편안해 보인다. 레이노와 발토의 여행은 좀 더 일탈에 가깝다. 핀란드는 분명 유럽인데 이들은 바다를 보는 게 꿈이라는 어떤 미국인만큼 고립된 듯 보인다. 대륙을 향한 긴 국경은 러시아와 맞닿아 있고 비슷한 기후의 이웃 스칸디나비아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들은 분명 바다를 가졌는데 때론 그 어떤 내륙국보다 이웃들에 더 샌드위치된 느낌을 준다. 
 
여행은 어쩌면 입자가 가장 큰 삶의 에피소드이다. 아무리 성긴 체로 걸러내려고 해도 그 기억은 물리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동안은 끝까지 남는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사람들은 더 자잘한 에피소드를 찾는다. 떠나 온 여행을 좀 더 의미 있게 촘촘히 채워줄 것 같고 그 여행을 좀 더 고밀도의 상위 폴더로 만들어줄 것 같은 사건들 말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큼의 의미는 없다는 의미를 발견하고 일상으로 터벅터벅 돌아온다.

길 위의 이들은 늘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을 늘어놓는다. 라플란드에 가봤자 순록만 있을 뿐이고 플로리다에는 여행온 핀란드인이 있을 뿐이라고. 우리 동네에도 있는 폐허를 보러 체코슬로바키아에 가는 것은 난센스라고. 그것이 전쟁과 잘못된 체제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는 순간이 만들어낸 그 주변세계의 공통적인 풍광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몹시 그렇다. 그리고 그런 여행자들을 향한 소극적인 조소들은 결국 떠나온 스스로를 향한 냉소로 돌아온다.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르고 실현불가능한 욕망의 나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이겨냈다는 착각과 함께 더 깊은 현실로 돌아오더라도 여행을 떠난다. 여인들을 저 멀리 세워놓고 보닛을 열어 놓은 채 스웨덴산 공구 지식을 늘어놓으며 그 남성스러움이 여인들에게 닿기를 바랐던 순진한 레이노와 발토, 말을 걸어주지 않는 심심한 남자들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줄담배를 피우는 타티야나와 클라브디아의 여행도 그런 여행의 모순을 피해 갈 수 없겠지만 아마도 그 생애에 다신 없을 여행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런 여행을 훔쳐보는 것은 늘 달콤하고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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