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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Chronicle

Vilnius 104_주전자 거리


여행객들의 잡담소리, 노천 테이블 위의 접시에 내리 꽂히는 맛있는 칼질 소리, 거리의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필리에스(Pilies) 거리 특유의 북적거림에서 갑작스런 음소거를 경험하고 싶을때 가장 먼저 숨어들 수 있는 베르나르디누 Bernardinu 거리. 셰익스피어가 머물거나 했던 역사는 절대 없지만 어쨌든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호텔과 여러 조각 작품들이 숨겨져 있는 꽤나 정겨운 마당들로 이루어진 꼬불꼬불 재미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이 거리의 초입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다름아닌 도자기 차 주전자들. 이미 오래 전에 와인샵이 되었지만 실제로도 저 가게는 향긋한 차와 커피를 덜어파는 매우 아기자기했던 장소였다. 이런 아늑하고 달콤한 곳이라면 일년 내내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겨울이어야만 할 것 같았던 곳, 벽이 품고 있는 주전자들의 마법에 홀려 들어가서 이 차 상자 저 차 상자를 열어보며 향을 맡고서 차를 사오곤 했던 추억이 있다. 그 행복한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구시가 세 곳의 차가게는 아쉽게도 지금 현재 모두 문을 닫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들 사려깊은 주전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 문을 빼고 주전자가 놓여있는 벽을 온전히 다 담으려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순간 야채며 과일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든 러시아 할머니가 너무나 헉헉 대시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으셨다. 날은 몹시 무더웠고 두 손바닥을 양쪽 허벅지 위에 얹으신채 숨을 고르다 겨우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으시는데 사진을 찍었다가는 뭔가 지금까지 여행지에서 숱하게 들어 온 각국 할머니들의 힐난 중 가장 매서운 소리를 들을 것 같아 할머니만 쏙 빼고 요리조리. 하지만 결국 한 숨 돌리시고 살만해지신 할머니로부터 '주전자는 찍어서 뭐하려고 그래 참' 하는 사진 찍으면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멘트 1위를 듣고야 말았다. 

 내가 처음 봤을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이들인데 성한 모습으로 오래도록 남아있는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빌니우스에 아이들 상대 도자기 공방도 참 많은데 가서 내 주전자와 내 찻 잔, 무엇보다도 나의 에스프레소 잔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이곳을 지날때마다 항상 한다. 저런 멋진 그림은 그려넣을 수 없겠지만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지. 

주전자들과 작별하고 뒤돌아서서 여전히 앉아 계신 할머니 사진 한 장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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