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2019.10.01 18:48


세수를 하다가 살짝 젖은 소매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요즘. 더이상 커피를 시키면서 얼음이 채워진 유리잔을 부탁 할 필요가 없어졌고 카페 바깥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위에는 아침에 내린 빗방울이 달리 어디로 굴러가야할지 몰라 그저 고여있는 그런 형상들. 새벽 햇살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여전히 지저귀는 새들이 있어서 좋다. 통상 이곳의 겨울 난방은 10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 낮 기온이 10도 정도로 3일간 지속되면 시작되지만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뚝 떨어지다가도 어느날은 낮기온이 15도를 넘겨버리는 중이라 빌니우스는 아직 난방을 망설이는 분위기이다. 4월의 중순 정도, 이제는 난방 끌만도 해 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장장 6개월간 지속되는 난방이니 만큼 벌써부터 난방비 내기 시작하는 것도 좀 그렇고 며칠 좀 춥더라도 최대한 천천히 시작됐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이따금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라디에이터를 만져보며 겨울의 첫 온기를 기대하는 이 시기 특유의 모순된 정취가 있다. 전기 포트 대신 가스레인지에 올린 주전자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끓여내는 커피와 차, 하루종일 목욕 가운을 입고 꿀을 찾아 배회하는 곰의 기분으로 어슬렁거리는 나태함, 추움에 임박해서 떠올려보는 추운 영화들과 추운 소설들. 좁은 발코니 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는 잎사귀들을 틈새로 밀어서 거리로 쓸어 버리는 하루하루. 이따금 소장용으로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러시아 소설들을 오프라인 중고서점 사이트에서 검색해보곤 하는데  지난 여름에 동생이 가서 사다 놓았던 열 권 남짓한 책들 중 한 권을 며칠 전에 받았다.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뻬쩨르부르그 연대기의 공교로운 시작을 잠깐 옮겨보자면.

'4월 27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뻬쪠르부르그 사람 하면, 잠옷에다가 침실용 모자를 쓰고 꼭 닫힌 방 안에서 두 시간마다 무슨 약인가를 한 스푼씩 떠서 먹는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그러나 마침내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고, 이는 다른 어떤 소식들보다도 값지다. 마지못해 침실용 모자를 벗어 버리고 생각에 잠긴 채 몸단장을 하고는 드디어 산책하러 나가기로 결심한다. 물론 스웨터에 털외투를 입고 방수 덧신을 신는 등 완전 무장을 한 채로 말이다. 그는 따스한 공기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떤 축제 분위기.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마차들이 내는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 등에 약간은 놀라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병에서 회복 중인 그가 마침내 네프스키 거리의 신선한 먼지를 마시게 된 것이다!. 그의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의심쩍은 듯,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은 미소를 머금은 듯 약간 삐뚤어진다. 질척이는 진흙탕과 공기 중의 진한 습기가 사라진 후 날아다니는 뼤쩨르부르그의 첫 먼지는 물론 달콤함에 있어 옛날 고향의 화덕에서 피어 오르던 연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산책을 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의혹의 표정이 사라지고, 마침내 그는 봄을 맘껏 즐기기로 결심한다. 봄을 즐기려고 결심한 뻬쩨르부르그 주민에게는 흔히 선량하고 순진한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도대체 그와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뼤쩨르부르그 연대기,열린책들-'

켜켜히 쌓여있었을 긴 겨울의 눈이 다 사라지고 난 후 눈 위에 지속적으로 쏟아 부어졌던 모래들이 만들어내는 봄 특유의 먼지들이 이곳에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 던 시기에도 지금과 같은 제설작업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겨울이 물러서는 4월의 중순은 먼지 조차 칭송할 수 있는 시기. 난방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시금 상기시키는 뻬쩨르의 4월, 내 가장 가까운 미래의 봄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이번 겨울은 전에 없이 더 온순하고 정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난 그의 소설이나 메모들에 기록된 구체적인 날짜들과 날씨 묘사들이 좋다. 그것이 내가 저곳이 아닌 이곳에 있다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빌니우스에서 며칠을 머물고 당도한 드레스덴을 따뜻한 이탈리아보다 훨씬 더 좋아하며 오래 머물렀고 어떤 메모에서는 심지어 베를린과 뻬쩨르가 닮았다고 적어 놓기 까지했다. 그들 모두는 조금씩은 닮았다. 언젠가 관광객들의 구태의연한 동선에 목이 졸리듯 휘감겨있던 피렌체 시내에서 뉴델리의 부산스러움과 폭발하는 열기를 감지하고서 향긋한 추억에 젖었던것처럼 기억을 연장시키고 공고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습도와 온도 바람들이 만들어내는 공기의 예민함이다. 빌니우스에서의 생활에 안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 마음이 아주 오래전부터 러시아 소설들이 내포하고있는 원시적이고 역설적인 아늑함에 많은 자리를 내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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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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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설마

    그곳으로 떠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를 펼쳐야 할거 같은 밤.

    2019.10.04 00:21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 글이 넘좋아요. 문장도 분위기도.
    근데 저는 뻬쩨르에선 4월과 10월이 젤 힘들었어요 난방 안해주고 춥고 음습하고 비오고 진눈깨비 ㅋㅋ

    2019.10.05 00:4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