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여행이 여의치 않은 시기에 넌지시 꿈꿔보는 여행이 가장 심정적으로 가깝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내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런 구체적인 준비 자세도 취할 수 없는데에서 오는 절대적인 자유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여행의 정수는 결국 환상하는 그 순간 자체에 있으며 어떤 대안이나 변화에 대한 갈망은 결국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여행의 본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느끼고자 하는 모든 감각들, 그 모든 것은 사실 현실에서 용이하다. 그것을 애써부정하고 자꾸 미래로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우리가 낭만적이라 느낄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을 굳이 부정하고 거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코 모든것이 꿈같진 않더라 라고 실망하는 순간만 영리하게 피할 수 있다면 결국 모든것은 무결점의 환상으로 남는다. 딱히 숫자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은 '가까운 시일' 안에 뻬쩨르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래된 기억들을 새로 고침 할 겸 도서 목록을 검색하니 뻬쩨르부르그 론리 플래닛이 보였다. 꽤나 오래 전 버전이었지만 어쨌든 예약을 걸어놓고 도서관에 가보니 너무나 익숙한 표지. 13년 전 러시아 여행 때 읽었던 당시에는 아주 따끈따끈했던 2005년 버전이었다. 맞아. 이런 내용들이 있었지. 죄와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동선을 기초로한 워킹투어 루트, 에르미타쥐의 전시물에 관한 세세하고 습관적인 설명들. 많은 기록되지 않은 내 개인적 기억들은 당연히 휘발된 상태였다. 돔 크니기와 네프스키 대로변의 어느 일식집. 밥을 하다가 태워버린 법랑 냄비가 있던 이름 모를 대학 기숙사 숙소와 그곳에서 메트로를 향하던 질퍽한 길목의 풍광들이 간혹 기억날뿐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다 뻬쩨르 숙박편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가 머물었던 가장 저렴했던 그 숙소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게되었다. 발찌스카야 울릿짜로 표기된 주소의 페트로프스키 컬리지 기숙사. 모스크바에서 머물던 갈리나의 집 근처에도 라트비아 대사관이 있었는데 내가 그때 머물었던 모든 곳이 결국 이 쪽 동네로 흘러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정거장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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