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받은 소포 상자 속에 들어있던 국물 떡볶이 한 봉지. 이런 것들은 여행에서 가져온 한 움큼의 초콜릿이나 선물로 받은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카페의 커피콩처럼 희소가치가 있으므로 최대한 예를 갖춰서 대해야한다. 푸힛.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는 순간을 섭취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래서 유통기한을 숙지한 상태에서 냉장고의 가장 깊숙한 곳에 놔둔 채로 끊임없이 기회를 보며 언제 먹을 것인가. 어떻게 먹을 것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보면서 먹을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생긴 후에야 포장을 뜯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무엇을 보면서 먹을 것인가이다. 대부분은 책장에 꽂혀있는 영화 중 하나를 본다. 음식을 먹느라 열심히 보지 않아도 놓칠 것이 없을 만큼 잘 아는 영화. 그럼에도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젓가락질을 해야 할 만큼 또 빠져드는 영화. 여러 번 봤음에도 잊고 있던 뭔가를 또다시 기억하게 하는 영화. 사실은 책장에 꽂혀있는 영화들 대부분이 그런 영화들이기도 하다. 물론 묵직한 감동을 주는 영화보다는 위트있고 유쾌한 영화들이 대부분 후보에 오른다.
양배추를 비롯한 각종 야채와 면과 삶은 달걀까지 집어넣어 양을 잔뜩 늘린 이 신성한 떡볶이의 배경으로 선택된 영화는 닉 혼비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 한국어로는 '사랑도 리콜 되나요'라는 참으로 재치 있는 제목으로 번안된 스티븐 프리어즈의 High fidelity이다. 레코드 가게 주인 존 쿠삭이 그 인생의 5번의 처절한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 그리고 그 도중에 흐르는 수많은 음악과 그 음악에 대한 담론. 저마다 자기 취향에 입각해 그날의 탑 파이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음악에 미친 괴짜 레코드 가게 직원들. 베타 밴드와 스테레오 랩을 알게 해 준 영화. 잭 블랙의 인생 연기, 잭 블랙의 노래. 이 영화 자체를 좋아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인생 영화인 이유는 20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나에게도 틈만 나면 나만의 각종 리스트를 선정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좋아하는 영화 Top 20에 들어가고 좋아하는 사운드트랙 Top 10에 들어가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보고 싶은 영화 Top 5이며 잭 블랙 영화 Top 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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