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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Being Flynn (2012)

 

 

 

 

 

며칠간 본 영화들을 쭈욱 늘어놓고 생각에 잠겼다. 알고 있었지만 세상엔 재밌고 좋은 영화들이 정말 많구나. 그러니 재미없는 영화들이 단순히 재미없음을 넘어 괘씸하게 느껴질 수밖에. 아이리쉬 맨을 볼 날을 기다리며 로버트 드 니로의 출연작을 다시 훑어보다 듣도 보도 못한 영화가 있어서 보기 시작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도 재밌었으니 플린 되기도 재밌겠지. 로버트 드 니로와 폴 다노라니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언젠가 알 파치노와 조니 뎁,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그랬듯이. 슬픈 영화가 아니길 바랬다. 이제 슬픈 영화를 보는 것은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영화는 꽤나 도발적인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미국에 위대한 작가 3명이 있으니 마크 트웨인과 샐린져 그리고 나, 조나단 플린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조나단 플린은 이렇듯 자존감 갑인 아저씨이다. 반사적으로 얼마 전에 본 Can you ever forgive me (https://ashland11.com/870)의 리 이즈라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리 이즈라엘이 어쨌든 출판 경력이 있었고 비록 임대료가 밀렸을지언정 경비원이 딸린 아파트에 살며 바에서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즐기는 여유가 있었다면 조나단 플린의 상황은 겉보기엔 조금 처량하다. 그는 틈만 나면 아래층의 밴드 합주 소음이 마루를 뚫고 올라오는 좁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어느 날엔 그 소음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아랫집을 몽땅 다 부수고 나서 그는 아파트에서조차 쫓겨난다. 그리고 그는 18년 동안 연락하지 않은 아들에게 전화한다. 빨리 이삿짐 옮기러 오라고. 너는 나의 유일한 상속자이니 내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라는 꽤나 솔깃한 말과 함께. 하지만 그는 잡동사니만 잔뜩 실은 트럭과 가짜 잭슨 플록의 작품 하나를 던져주고 또 유유히 등을 돌린다. 

 

 

 

 

분명히 폴 다노는 캐스팅이 되고 나서 엄마한테 전화했을거다. '엄마, 나 로버트 드 니로 아들 역 맡았어! 믿어져? '. 뭐 적어도 내 아들이 그런 전화를 걸어온다면 난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축하해줬을 거다. 닉 플린은 18년 동안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가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자랐다. 나는 위대한 작가이며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거라는 아버지의 당당한 편지 속 외침을 들으며 그 자신도 작가의 꿈을 키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여자 친구의 아파트에서 쫓겨나며 거리로 나앉는다. 그 묘한 시기에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둘은 조우한다. 남편 없이 투잡을 뛰며 아들을 키운 엄마는 유서를 남기고 이미 세상을 등진 후이다. 

 

 

 

 

이 장면은 영화에 없었다. 남편과 아내역을 맡은 드 니로와 줄리안 무어는 단 한 번도 한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 대신 엄마의 남자 친구들이 던져주는 야구공을 받으며 자랐다. 매번 공이 돌아올 때마다 그는 공을 던져주는 사람이 아버지였길 바랬을 거다. 아버지와 남편의 부재. 생각해보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누군가의 삶을 다루던 티브이 드라마들은 사회적 통념상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관계를 얼마나 평면적으로 다루었나. 가족을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심지어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나이가 다 들어서 나타난 게다가 기고만장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드라마대로라면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 영화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아들, 불행한 엄마의 삶, 고개 숙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 모두의 삶은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가족의 불행이 가장의 일탈로 시작된 것이라 치더라도 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란 좀 찝찝한 구석이 있다. 그 누구도 그 삶에서 불행을 의도하진 않기에.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오갈 데 없어진 조나단 플린은 운전하는 택시에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음주 운전으로 택시는 물론 면허마저 잃는다. 어딜 가도 술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리 이즈라엘이지만 조나단 플린은 심지어 택시 영업 중에도 보드카에 오렌지 주스를 섞는다. 그 시점에 아들 닉 플린은 노숙자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제발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랬지만 마치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등을 돌렸던 아버지는 결국 거리를 전전하다 아들이 일하는 노숙자 센터에 입성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조우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곳에서조차 소란을 피우고 쫓겨난다. 하지만 이 대책 없는 아버지의 생명력이란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버지는 오히려 당당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황당하고 밉지만 사실상 그 생명력에 압도당한다. 어린 소년에게 오랫동안 편지 속에서만 존재했던 아버지는 상상하고 또 상상해도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런 아버지에 실망하고 그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에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아버지는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는 있는 걸까. 그런데 표면적으로 가진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아버지는 절대 나처럼 살지 말라는 식의 없어보이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스스로 삶을 등졌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당당해 보인다. 이것은 어쩌면 평생을 그 자신이 되고자 발버둥 치면서 산 아버지 이전의 어떤 남자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제 막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아들 이전의 어떤 남자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리고 어떤 사회적 테두리 안에 머물며 행복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완전한 나가 된다는 것은 늘상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하지만 모든이들이 완전한 자기가 되기 위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타협하고 내려 놓는다. 그것이 결국 내 스스로의 행복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모른다. 스스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우리는 얼마나 가졌는지로 타인의 삶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판단하는데 익숙하다. 보여줄 결과물이 없을 때 우리의 자존감은 곤두박질친다. 출판된 책이 없으니 작가라고 부를 수 없고 물려줄 것 하나 없으니 초라한 아빠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은 허상이다. 우여곡절 끝에 조나단 플린은 임대 아파트를 받고 부자는 다시 조우한다. 아들은 작가라고 자부하는 아버지의 글이 궁금하다. 그리고 그는 거리를 전전하던 순간에도 몸에 지니고 다니던 원고를 꺼내어 보여준다. 조나단 플린에겐 그 수권의 원고가 전재산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그 누구도 출판해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의 의미나 다름없었던 그 자신의 인생에서는 예술로 남을 원고이다. 글을 써보려고 하는 중이라는 아들의 말에 작가는 글을 쓰거나 쓰지 않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은 결국 살거나 살지 않는 두 종류의 동사로 귀결되는 것일까. 모두가 남이 보기에 반짝이는 금빛의 인생을 살 수 없다면 자신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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