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비슷해서 더 그랬겠지만 빛이 바랜 사진 느낌의 포스터에서 오래전 영화 비포 더 레인을 회상하며 보기 시작했다. 멀리 펼쳐진 언덕을 뒤로하고 또 다른 언덕 어딘가로 급히 오르고 있는 짐가방을 든 두 여자의 느낌도 좋았다. 언덕 너머에 뭐가 있을까. 뭐가 있을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서 오르는 언덕은 아니길 바랬다. 저런 목가적인 풍경은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불행을 도드라지게 했고 세상은 또 나 몰라라 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리곤 했다. 부디 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비포 더 레인에 마케도니아의 어느 높은 절벽에 홀연히 위치한 정교회가 등장했다면 이 영화는 루마니아의 궁벽한 정교 수도원이 배경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들 나라들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를 그런 산과 평원, 가까운 하늘을 공유하며 비슷한 색채의 유사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좀 더 멀리 가서 터키나 이란 영화에도 은근히 녹아있는 그런 우울하고도 이국적인 정서가 이 포스터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알리나와 보이치타. 독일에서 일하는 알리나는 보이치타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으로 고향 루마니아로 돌아오지만 정교 수도원에서 수녀의 삶을 시작한 보이치타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뿐이었던 어린 이들 사이에는 성적 교감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으며 알리나는 여전히 그 감정에 얽매여있지만 보이치타는 이제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신 뿐이라며 알리나가 꿈꾸는 둘의 삶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독일로 돌아갈 날은 다가오지만 보이치타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알리나는 불안하다. 보이치타는 오갈데 없는 알리나를 수도원에 머물게 해달라고 신부님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알리나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조건과 함께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자리가 없는 빠듯한 수도원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치타는 알리나 역시 자신처럼 종교에 귀의하기를 바란다. 알리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전처럼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 그 둘이 계속해서 함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나는 입만 벌리면 신을 들먹이는 보이치타에게서 배반감을 느끼고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과격해진다. 수녀들과 신부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난폭해지는 알리나를 악마에 씐 것으로 간주하고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결박한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지만 오히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코미디라는 장르를 빌려 만들어낸 웃음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그 본인들은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남다른 원칙으로 그 상황을 존속하고 보호하려고 진지한 얼굴로 애쓸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 수도원은 신의 부름을 받고 종교적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기 보다는 나이가 차서 고아원을 나와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발을 들여놓는, 마치 일용직 근로자들을 가득 태우고 일터를 향하는 허름한 봉고차처럼 치열한 곳이다. 보이치타가 수도원의 규율에 반하는 알리나의 행동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친구가 걱정되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수도원말고는 더 이상 그 인생을 책임져 줄 곳이 없다라는 불안감에서이다. 결국 독일에서 유람선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든 루마니아의 고립된 산자락 어디에서 수녀가 되든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이른 아침 수도원의 아침 식사 시간을 채우는 것은 종교적 위엄이 깃든 성스러운 대화라기보다는 여보 쌀이 떨어졌어요 식의 의식주 해결에 관한 세속적인 대화들이다. 수입과 지출을 잘 안배하고 한 푼 한 푼 아껴써야 성당벽에 그림 그릴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 성당이 좀 더 믿음직스러운 곳으로 발돋움하려면 기적의 이콘도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정교적 요소와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서인지 사실 수도원의 일상이 묘사된 부분은 아름답다 느꼈다. 눈으로 뒤덮힌 수도원의 풍경과 극단적인 추위 묘사도 좋았다. 전기가 없어서 촛불을 켜고 생활하고 매번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번거로움도 금욕적인 고행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 모든것은 마치 중세시대를 연상케하는 고립되고 낙후된 수도원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첩첩산중에 한때 곳간으로 쓰였을 법한 집들을 개조해서 만든 듯한 지붕도 채 이지 않은 궁색한 수도원을 보니 이곳은 이제 막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루하루의 행보가 의미심장하다. 이 장소가 성스럽고 신실하다는 소문이 나야 이 공간은 유지될 것이며 후원금이 생겨야 제대로 된 난방도 할 수 있을 거고 물이 새지 않게 지붕도 고치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구색에 맞춰 성당 벽화도 그려야하고 이콘이 놓일 장소도 잘 보살펴야 한다. 그저 신을 믿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의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난방도 되지 않는 꽁꽁 언 방 속에서 우물을 깃는 쇠사슬로 꽁꽁 묶인 가엾은 양을 향한 기도, 알리나를 결박하는 수녀들의 몸짓과 눈짓은 진심으로 알리나를 걱정하고 있으며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절박하다. 그들은 정말 진지하다. 알리나를 향한 조금의 악의도 없다. 그들은 맹목적인 신념에 매몰되어서 그것이 빚어낼 결과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할정도로 무지하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 선 아니면 악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사실 영화의 결말에 있어서는 애매하다. 알리나는 구급차에 실려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결박한 흔적,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알리나의 상태등으로 수도원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간다. 자신들이 한 짓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며 울먹이고 절규하는 사람들 뒤로 보이치타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하다. 결국 알리나를 악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보이치타였을까. 돌아왔던 곳으로 다시 가라며 한밤중 알리나를 감싼 쇠사슬을 풀어준 것은 이제는 해방되고 싶은 스스로를 향한 고발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그 자신을 압도한 무지한 신념의 극치였을까. 이 영화도 크라이테리온에서 발매되었네. 좋은 화질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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