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도 거의 3시간 가까이나 돼서 더럭 겁이 났지만 너무나 재밌다는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를 지닌 채 기대를 너무 많이 하면 실망할까 봐 최대한 자중했던 그 노력이 불필요했다 느낄 만큼 좋은 영화이기를 기대하면서 보았다. 이것은 확실히 너무나 잘 만든 영화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봉준호 최고 영화가 마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마 괴물을 기점으로 더없이 확장된 봉준호 영화의 스케일과 누구라도 공감할만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 냉소적 유머를 가미한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그의 영화가 이제는 내 개인적 추억과 애정을 가지고 대하기엔 너무 거대하게 느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인공적인 웃음을 뺀 마더 특유의 일관된 긴장감과 분위기가 결국 그의 연출에 있어서는 가장 오리지널 했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전히 김혜자의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물론 마더와 같은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탈 순 없었을 것이고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이만큼 어필할 순 없었을 거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가장 흡입력 있고 영화적 매력이 극대화된 중반 부분 (과외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좁고 궁색한 동네 골목을 빠져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해서 깔끔하고 폐쇄적인 부자 동네를 올라가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가족이 부촌에서 탈출하여 빗속을 뚫고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시궁창이 되어버린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까지)을 지배하고 있는 서스펜스는 결국 이미 마더를 통해 보여준 그의 도발적이고도 탄탄한 연출력이 확장된 절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어버릴 수 없는 수직의 사슬로 촘촘하게 직조된 사회와 그것의 최상위 포식자로 위치한 상류 사회에 대한 이물감은 버닝이나 하녀와 같은 영화에서도 다뤄졌다. 그 영화 속의 인물들 역시 그 뿌리 깊은 계층간 모순의 희생양이 되며 결국은 몰락한다. 이 영화는 비슷한 상황을 좀 더 대중적이고 유쾌한 화법으로 풀어낸다. 결론이 좀 달랐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은 아마 만약 내가 이 영화에 실망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실망할지에 조금 초점을 맞추고 봤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왕 피를 본 김에 좀 더 하드고어로 갔어도 좋았을 거다. 가령 모든 사건의 발생 이후에도 저택의 지하실에 남아 연명하는 송강호가 화장실 변기를 얼마간 응시할 땐 지하실 속에서 썩어가는 가정부의 시체를 토막 내서 변기 속에 조금씩 내려보내다 미처 내려가지 못하고 떠오른 살점을 응시하는 것이라 순간 상상했는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당에 손수 잘 묻어줬다고 봉준호 영화 속의 송강호 특유의 톤으로 얘기하는 부분은 나로서는 끝까지 조금 더 웃픈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던 불필요한 노력이었다고 느껴졌다. 코엔 형제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던 자잘한 블랙 유머들을 봤을 땐 좀 더 마음껏 자조하고 비웃으며 끝까지 끈덕지게 빌붙는 식의 극한의 블랙 코미디였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누가 어떤 특정 장르에 좀 더 집착하느냐의 개인적 취향에 따른 아쉬움 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의 가장 강력한 복선은 아마도 뜬금없이 과외 선생님을 케빈이라고 칭하는 포복절도할 순간 인디언 복장을 한 아들이 활을 쏘며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 부분에서 이미 이 영화의 참극은 예상됐다. 감독과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한 틸다 스윈튼이 출연했던 케빈에 대하여에서 그녀의 아들 케빈은 정원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고 학교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무차별적으로 활을 쏘아 죽인다. 거실에 걸어놓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의 그림이 결국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라는 짝퉁 미술 치료 교사의 말에 벌벌떠는 부자 엄마에 대한 냉소적 묘사는 어딘가에서 차용해 온 소재도 뒤틀어서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감독의 능력임이 분명하다. 핸드폰 케이스에 적힌 회사의 이름이 잘 손질한 심플한 명함 위의 회사로 재탄생하고 그 명함 한 장에 솔깃한 표정을 흘리는 사장의 모습에서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누구의 명함이 더 잘빠졌는지로 설전을 벌이는 속물들 속에서 절망감에 빠지는 크리스천 베일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라서 재밌었다. 많은 인상적인 장면들 중에도 잊히지 않는 것은 8분 안에 짜파구리를 끓여야 하는데 한우를 썰어 넣는 장면. 하수구를 배회하는 쥐새끼들처럼 먼발치에서 클로즈업된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가는 가족들의 모습과 벼름박에 일관적으로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이 슬로모션 처리된 부분이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아름답기조차 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미장센이 떠오를 만큼.
그리고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그때, 마치 두고두고 되돌려 보고 멈춰서 보고 늦춰서 보고 싶을만큼 웃음이 남아있던 그 순간, 오줌을 싸는 그 나쁜 놈을 향해 그 거대한 수석을 들고나가 길바닥에 박살 내어버렸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찰나의 순간 눈과 귀를 가리고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른다. 온 동네를 전부 집어삼키는 폭우 속에서도 보란 듯이 떠오르고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있던 치부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류하며 그 탐욕은 소독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소독약도 결코 박멸할 수 없다. 피땀을 흘려서 번 5천 원과 수를 써서 번 천원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은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만족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5천 원을 향한 노력은 시간 낭비이고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진다. 줘도 못먹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편법이 횡행한다. 그리고 그 모든 혼돈 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누군가는 더 크고 견고한 조각의 빵을 소유한채 군림한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왠지 돈을 쉽게 벌었을 것 같다. 과외비에서 지폐 몇 장 빼내지 않아도 그들은 여전히 풍족할 것 같다. 양주 몇 병 빼서 마셔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도 귀뚜라미가 날고뛰는 반지하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을지도 모르는일이다. 비슷한 형편에 놓인 사람들을 머리 굴려 눌러 밟고 간신히 벗어난 어떤 지난한 삶은 결국 어떤 섬유 유연제로도 씻어낼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표식이 되어 자괴감을 증폭시킨다. 누군가의 삶에 어쩔 수 없이 종속되어 있는 삶.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이 지긋한 삶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잘못 건드린 버튼 하나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삶.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담배연기 속에서 야심 차게 위조한 졸업 증명서 한 장이 영원불멸해 보이는 그 피폐한 삶을 삭제할 수 있었다면. 없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삶. 있어 보인다라는 말에 얽매여 있는 삶. 그리고 그것에 보란 듯이 속는 삶에 그 사슬은 녹슬지 않고 더 촘촘해진다.
언젠가 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 본 홍콩의 야경이 생각났다. 식민지 시절 영국 상류층이 주로 살았다는 온 홍콩이 내려다보이는 그 높은 산까지 오르는 말을 대신할 교통수단으로 설치됐다는 피크 트램. 그 트램을 타기 위한 티켓 오피스로부터 저 아래 내리막길까지 몇 시간에 걸쳐 연결되어 줄어들지 않던 줄. 그 멋진 야경을 가득 채운 높게 증축된 건물들과 그 건물 어딘가에 간신히 사람 한 명 누울 만큼의 작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마도 더 좌절스러운 것은 욕망하는 것 자체도 사치인 삶, 머리를 써서 기생할 가능성조차 갖지 못한 채 완전히 물에 가라앉아 버린 누군가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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