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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Can you ever forgive me (2018)

 

 

 

많은 좋은 영화들을 보지만 저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친구가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이나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 칼리토 같은 내가 두고두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영화 캐릭터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너무나 행복했다. 누군가가 생각나면 그의 사진을 꺼내보는 것처럼 어떤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을 뺏어간 인물의 습관, 그의 유머, 말투, 그의 생활공간들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허구의 인물에 어떤 추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나에겐 그것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매력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매일의 일상으로 채워진 우리의 삶 자체가 내일이라는 명백한 허구를 향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영화를 두 번째 보는데 첫 번째 볼 때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친 문구가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한 줄. 순간 너무나 슬펐다. 아 저렇게 반짝이는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었다니 출처를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었다. 그녀가 허구의 인물이었다면, 이것이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 자체는 더욱 빛났을 거라 생각하니 역설적으로 이것이 꾸며낸 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이상야릇한 배반감을 느낀 것이다.

 

 

영화 속의 리 이즈라엘은 슬럼프에 빠져든 전기 작가이다. 장난 전화 걸기를 즐기고 설거지를 할때조차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파트 임대료를 낼 돈도 병든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갈 돈도 없는 그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어떤 작가의 편지를 서점의 수집상에게 팔고 돈이 된 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유명 인물들이 교환했을 법한 편지들을 제조하는 나름의 창작을 시작한다. 고양이 약값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일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그의 본능에 불을 지피며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진다. 그녀는 여러 타입의 타자기를 집에 구비해놓고 작가들의 사인을 위조하고 심지어 오래된 편지처럼 만들려고 편지를 오븐에 굽기도 하며 스스로의 재능에 빠져든다.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스마트한 지능범이 없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그녀의 행위는 발각되며 처벌을 받는다. 그녀는 결국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그러니 있지도 않는 작가들의 편지를 창작해서 벌 받은 사람의 자전적 소설을 다시 각색해서 만들어진 이 영화의 탄생 배경 자체가 신선하다.  

 

 

배경은 90년대의 뉴욕이다. 2년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신기하게도 나 홀로 집에 2탄에서 케빈이 성탄절을 보내던 그 90년대의 뉴욕의 느낌이 너무 진하게 묻어났다. 아마도 그렇게 내가 영화를 통해 접한 뉴욕의 첫인상이 그 도시에 대한 추억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뉴욕이라는 도시 특유의 심상을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내려고 애를 쓰던 우디 앨런의 영화를 필두로 한 많은 영화들에서 때로는 배타적인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영화는 세련되지도 잘 나가지도 않는 어떤 개인의 추억과 애상이 아기자기하게 묘사돼서 귀엽다는 느낌을 가지고 봤다. 마치 특선 대작들 사이에 끼워서 방영되는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오후에 해주는 그런 영화의 느낌 말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내 것이었으면 하는 인물의 일상들 습관들 같은 것이 있다. 지금도 고스란히 저런 장소들이 남아있을까 싶은 뉴욕의 오래된 서점들, 늦은 밤 승객이 드문 허름한 지하철 안에서 미국인들이 손에 쥐고 읽곤 하던 두껍지만 가벼운 그런 책들을 팔 법한. 리 이즈라엘이 낮술을 하기 위해 습관처럼 드나들던 동네 술집, 레즈비언인 그녀의 나이 든 게이 친구, 그들이 걷는 거리와 그들의 자유분방한 대화, 여러 영화들을 통해 등장하던 비슷한 구조의 뉴욕의 아파트 등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도 발랄하게 그려진다. 90년대의 뉴욕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젖어드는 아련함은 아마도 내가 접속이나 초록 물고기 같은 영화를 보며 빠져드는 그것과 비슷할 것 같다.  

 

 

리 이즈라엘의 이 아파트 구조는 익숙하다. 저 정도의 삶은 우리 눈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보통 좀 뭐가 잘 안 풀리는 주인공들이 사는 집으로 나오는 거 보면 미국의 생활 수준이 확실히 나은 건가.라고 생각하다가도 엄청 큰 집에 살고 두세넷의 아이들을 키우며 3리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오렌지 주스를 아침에 꺼내어 먹는 주인공들도 보통 모기지론으로 집 산 처지일 테고 저런 아파트도 우리의 주인공들을 임대료에 허덕이게 만들곤 했겠지. 그 와중에 저 케맥스 드립 포트 옆의 커피 잔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극 중 그녀의 생활 습관으로 보건대 저 필터는 아마 한 달 넘게 치우지 않아 커피 찌꺼기 위에 곰팡이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 그녀도 절대 잊지 않는 것이 있으니 고양이 밥 주기. 고양이 약 사려고 시작한 범죄 행위는 사실 고양이의 죽음과 함께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기며 그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리 이즈라엘의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것은 유명 인물들이 교환한 서신이나 물건들을 되팔고 수집하는, 책 속에 굳어진 케첩 자국조차 상업화하고 소비할 수 있을 것 같은 미국 특유의 문화이다. 게다가 작가들의 삶과 그들 특유의 필치를 잡아내는 그녀의 능력까지 더해져서 편지 위조 행위는 꽤나 그럴듯한 창작 행위가 되어간다. 그것은 결국 범죄 행위였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그의 용기이자 재능이라 느껴졌다. 그녀는 그 능력을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할애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극 중 출판사 사장의 말처럼 상품 가치도 없는 다른 인물의 전기문을 쓰는데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그녀는 게으르고 타성에 젖은 작가일 뿐이다. 그녀에게서 몇 통의 위조된 편지를 사들인 서점의 여주인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리 이즈라엘을 동경하며 그녀가 쓴 짧은 소설의 원고를 읽어 봐 달라고 건넨다. 리 이즈라엘은 그 원고를 쉽사리 읽지 못한다. 자기의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용기.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그녀는 점점 더 위조 행위에 매달린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휘황찬란하고 격동적인 그 도시의 한편을 배회하는 외로운 인물들의 삶을 무심한 듯 진실하게 묘사한다. 갈 곳이 없는 나이 든 게이를 연기한 리처드 E. 그랜트의 연기는 내가 본 동성 연애자 연기 중 최고였다.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베를린을 배회하던 파니 핑크와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던 동성 연애자인 아프리카 주술사의 모습도 떠올랐다. 미움받고 손가락질당해도 생긴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인물들, 그들이 만나서 오직 자기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선물 받았을 때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편집장 친구의 삶에서 넓은 아파트를 상속받은 행운만을 부각시키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매너리즘에 빠진 리 이즈라엘이 남의 삶을 위조하며 쾌감에 젖는 것을 보며 아슬아슬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의 행위에 빠져든다. 타자기를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위조에 몰두하는 그녀를 보고 범죄자를 향한 비난 대신 우리가 느끼는 이 카타르시스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것에 치이고 저것에 치여서 제대로 나 답게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만이라도 나 자신의 삶에 완전하게 취하게 하는 그 섬광 같은 자기 긍정과 확신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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