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55) 썸네일형 리스트형 도서관에서 차 한 잔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장갑은 확실히 안 껴도 되고 5개월을 주야장천 입었던 제일 따뜻한 패딩도 이제는 드디어 세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계속 비가 오고 있는 걸로 봐선 내일부터는 분명 또 기온이 내려갈 것이다. 오늘의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따뜻하고 서머타임도 시작되어 어제의 22시는 오늘의 23시가 되었다. 며칠 후면 내가 빌니우스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주간이다. 그때 게디미나스 언덕에는 찢은 론리플래닛을 꽂을 수 있을 정도로 녹지 않고 얼음 결정이 되어가는 단단한 눈들이 가득했었고 어떤 날은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 호스텔 접수창구(?) 아주머니에게 우산을 빌려서 돌아다녔었다. 17년 전보단 확실히 따뜻해졌지만 날씨의 패턴은 여전히 비슷하다. 대부분의 카페들이 바깥으로 테이블을 내다 놓기 .. 부시아테로 만든 할머니 파스타, 세상에 참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가 있는데 그 파스타 종류 이름만 다 알아도 이탈리아 단어 500개 정도는 그냥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뭐 무슨 모양이든 만들어서 이름 붙이면 그게 곧 그냥 파스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신발 주걱 모양 파스타도 빨래집게 모양 파스타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누가 만들고 있을 것만 같다. 가끔 파스타 만드는 영상을 찾아보는데 요리 메뉴로서의 파스타 말고 그냥 요리사든 할머니든 누구든 밀가루 반죽해서 밀고 굴리고 누르고 굳이 구부리고 집고 자르고 해서 여러 가지 형태의 파스타 면을 만드는 영상들이다. 이 뻥튀기 같은 파스타의 이름은 Busiate 란다. 길게 자른 파스타를 대바늘 같은 꼬챙이 위에 놓고 굴리고 감아서 쭉 빼면 저렇게 되는데 시칠리아의 트라파니라는 지역.. 스탠리 투치의 책 동네 마트 2층의 서점에 잠시 갔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장 두 페이지 정도만 읽고 나왔는데 재밌다. 배우 스탠리 투치가 쓴 음식 에세이였는데 중간중간 이탈리아 집밥 레시피도 보였다. 다음날 도서관에 간 김에 대출하려 했지만 대출 예약만 하고 왔다. 5번째 대출 예약자라고 했다. 제목은 '맛, 내 인생의 음식 Skonis, Maistas mano gyvenime. 정도가 되겠다. 스탠리 투치는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 빅나이트의 배우이자 감독이기 때문에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책의 제목이 완전히 수긍이 갔고 책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은 후에야 스탠리 투치가 레시피 북도 출간했고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병을 앓고 음식 섭취가 얼마간 불가능했던 .. 어느 12월의 극장 만약 이곳이 뉴욕 브로드웨이의 어느 극장이거나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이거나 하면 이 장면은 뉴요커나 파리지앵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그런대로 설득력 있는 풍경일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그곳이 아닌 이곳에 살고 있어서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들 앞에 굳이 지정학적 수사를 붙인 후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인 것처럼 감정이입 하는 것이 의외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에 놀라곤 한다. 나에게 이런 장면은 명백히 올가 혹은 옐레나, 아그네, 그레타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샤바의 쇼팽 연주회에서 마주르카를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도 그렇다. 이들 모두를 가둬 버리는 아주 깊고 넓고 차가운 호수가 있다. 파리에서의 1년에 대한 향수를 호소하며 꿈에 젖던 하얼빈의 러시아어 시간 .. 12월의 무라카미 류 12월 31일에 무심코 부엌 바닥에 흘린 밥풀을 하루 지나서 1월 1일에 밟았다고 치자. 슬리퍼에 눌어붙은 밥풀이 알아서 떨어질 리 없으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일 위 여기저기에 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고작 식은 밥풀 하나가 정말 이렇게 끈질기게 찐득 거릴 수 있다니 탄복할 즈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리퍼를 벗어서 하루 만에 4배의 크기로 짜부라진 '작년의 밥풀'을 그렇게 뜯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겨울인데 마치 지난겨울처럼 느껴지는 작년의 겨울 몇 장면을 떠올린다. 더 늦기 전에. 12월 초에 예상치 못한 책 소포를 받았다. 이웃님께서 여행중에 읽으시려고 가져간 책들을 다 읽으시고 빌니우스로 보내주신 것이다. 게다가 이 초경량 귀염뽀짝한 무라카미 류의 책은 또 너무나 의외였다. .. 지난 12월의 차 24잔. 11월 초에 친구가 보내온 어드벤트 달력. 푸카차는 클리퍼, 요기차와 함께 내가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허브차인데 성분이나 성격에 있어서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확고한 차이가 있어서 몇 종류씩 사놓고 번갈아가며 마신다. 보통은 그날을 정리하는 의미의 마지막 차로 자기 전에 마시곤 했는데 12월엔 주로 아침 시간에 마셨다. 이건 아마 전 날 저녁에 먹다 남은 버섯을 팬 채로 그래도 데우다가 달걀 추가해서 먹은 아침이다. 마지막달 12월이 보통 그렇지만 역시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빨리 흘러간 것 같다. 작년 12월엔 눈이 정말 많이 왔고 크리스마스까지 점점 어두워지는 경향에 발맞춰 유난히 몸과 마음이 정말 느리고 고요하게 점점 가라앉으며 평온해지는 상태가 되었다. 눈 덕분에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12월의 11월 연극 회상 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마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빈도로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좀 뜸하게 마셔야 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종이어도 명확하면 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자세와 감성은 또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나와는 다르겠지만 애주가의 영혼과 체질을 가지지 못한 나로선 딱 그 정도가 좋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연극보기 전에 진 한 잔을 마셨다. 술을 정말 거의 마시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대략 이렇다.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즌의 내용을 잠깐 되짚어 줄 때 내 기억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재빠르게 되감겨 들어가며 수렴될 때의 느낌이 있다. 눈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이 바로 이전 술의 맛과 향과 추억을 마치 방금 전에 마신 것인 양 아주 명료하.. 여름, Vasara, Лето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1일은 가을의 시작이다. 단지 달 앞의 숫자가 바뀔 뿐인데 어제의 여름이 보란 듯이 지난여름으로 재빨리 치환되는 것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방금 끌어올린 그물 속에서 아직은 상처 나지 않은 채 팔딱거리는 이 여름의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영원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8월일 때 느긋하게 회상하고 싶었던 여름인데 가을이 급히 들이닥칠 것을 알았으면서도 또 늦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느낌이 유난히 그득했던 지난여름. 여름, Vasara. Лето. 타인의 기억을 열처리하고 통조림해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감정 하나를 남겨준다는 것. 어떤 음악들. 노래하는 사람들. 어떤 영화들. 그들에겐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히페르볼레 Hi.. 이전 1 2 3 4 5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