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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멋진 영화들은 어떤 장면에서 멈춤 버튼을 누르든 전부 명장면이지. 아주 오래전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정말 정말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랬었다. 텅 빈 거리의 삐딱한 정적과 밤새도록 이곳저곳을 떠돌다 아침이 되어 겨우 잠들어가는 중의 퀴퀴함이 화면을 뚫고 전해졌으니 그것은 당시의 나에겐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어서 오그라듬은 오히려 아방가르드하게 보일 뿐이었고 값싼 철학을 롱테이크로 읊는 게으름뱅이의 배회는 저렇게 살아도 살아지는 삶에 대한 은근한 공감과 안도를 불러일으켰다. 삶은 정말 이렇게도 살아지고 저렇게도 살아지는 놈일 뿐인 것이다. 인간에게 더 이상의 오글거림을 포기하고 세상에 대항하여 자신의 모든 행동을 계면쩍어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는것이라면 그 시기는 아예 늦거나 영원히 오지 않아..
토마토 모리스 모리스라는 이름의 보라색 토마토가 팔길래 한 개 사와서 먹었다.
1월의 핫초콜릿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 중에 스모우크핫커피리필 이란 노래가 있다. '스모우크.핫.커피리필, 달이 뜨지 않고 니가 뜨는 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그런데 유독 커피도 아닌 핫초콜릿을 마실 때 이 노래가 보통 떠오른다. 하루하루 가장 짙은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12월에 온 정성을 다해 끓이는 한 잔의 핫초콜릿은 남아있는 온 겨울을 녹여줄 듯 짙고 따뜻하지. 그래서 1월만 되어도 별로 맛이 없는가 보다. 그러니 이것은 오히려 약발이 떨어진 핫초콜릿 속에 달 대신 떠오른 예쁜 마쉬멜로우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2021 년의 햇살 낮이 급격히 짧아지고 어둠이 어둠 그 이상으로 어두워져서 이 시각 이 계단에 내리쬐던 이 햇살을 보려면 해를 넘겨서도 더 많이 기다려야한다. 그 순간을 계절과 시간으로 특정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아 이 느낌이었지!' 하고 어떤 기억이 온 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순간에 도달하려면 사실상 딱 저 자리에 위치하는 순간과 함께 아주 까다롭고 미세한 조건들이 충족 되어야한다.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전선들 아래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을 따라 오래된 먼지와 담배 꽁초가 나뒹구는 계단이지만 층계참에 남쪽 건물 마당을 향해 내어진 창은 여지없이 이 햇살을 끌어와선 단단히 붙들어 놓는다. 이와 비슷한 풍경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살아갔을법한 사람들이 등장했던 많은 이야기들. 오래 전 그들로부터도 어쩌면 크게 달라..
서점 구시가에 검은 개가 사는 헌책방이 있고 고양이가 사는 헌책방이 있는데 이 고양이는 보통 소리 없이 다가와 신발을 핥고 있던가 책 위를 사뿐사뿐 걸어 다닌다.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결국 들어서는 순간 어디 있나 찾게 된다.
몇 권의 책 2년 전쯤인가. 문득 올해 이즈음에 뻬쩨르에 가게 된다면 참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구시가에 헌책방이 많은데 러시아어 책들이 꽤 많아서 돔끄니기 간다는 느낌으로 가끔 찾아간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온 사방 책을 누비며 기어 다니는 어떤 책방에서 지난달에 발견한 몇 권의 책들. 마치 어린이 도서관에 제일 찾기 쉽게 생긴 안데르센이나 그림 형제 동화 모음집처럼 두껍고 큰 판형의 책은 '죄와 벌'과 '가난한 사람들', '아저씨의 꿈'이 함께 수록되어있는 독특한 조합의 책이고 두 번째는 그가 보낸 서신의 일부를 모아놓은 책. 그리고 마지막은 겉표지의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왔던 '멸시받고 모욕당한 사람들'. 이 책은 오래전 리투아니아어로 꾸역꾸역 날림으로 읽고 비교적 최근에 한글로 다시 읽어서 느낌이 남달랐다. 나타샤..
여름 종료 8월이 끝을 향한다. 저녁에 부엌 창가로 더 이상 볕이 들지 않는 대신 아침은 한층 어두워져 건너편 병원의 불빛이 훨씬 도드라졌다. 언젠가 십자가 언덕에 다다르는 와중에 쏟아지던 우박과 몰아치던 폭풍 그리고 얼마 후 거짓말처럼 내리쬐던 햇살을 떠올린다. 그 이후로 8월 이면 그런 우박과 햇살을 한 번쯤은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이번 8월은 우박 없이 지나가려나보다. 비는 지속적으로 내리고 기온도 줄곧 떨어진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버섯 채집을 하러 이동한다. 정류장에서 양동이 가득 노란 버섯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았다. 끓인 다음에 양파와 판체타랑 잘 볶아서 크림에 졸여서 먹으면 정말 맛있는 버섯이다. 옛날 러시아 소설 읽다 보면 버섯 이야기는 단골이다. 말린 버섯을 할머니가 실에 꿰고 있는 장..
여름 6월을 흔히 여름의 시작이라고 한다. 고작 열흘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하지가 가까워 오고 있어서인지 이미 절반의 여름이 지나버린 것 같다. 겨울나무에 내려앉은 새들은 참 잘 보였다. 나뭇잎이 우거지고 나니 새소리가 무성해도 새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쉽다. 모두가 고요한 중에 유난히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있다. 그걸 딛고 날아가는 중의 새도 방금 막 날아와 앉은 새도 모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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