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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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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여행과 나중의 여행 가장 여행이 여의치 않은 시기에 넌지시 꿈꿔보는 여행이 가장 심정적으로 가깝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내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런 구체적인 준비 자세도 취할 수 없는데에서 오는 절대적인 자유 같은 것. 그것은 어쩌면 여행의 정수는 결국 환상하는 그 순간 자체에 있으며 어떤 대안이나 변화에 대한 갈망은 결국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여행의 본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고 느끼고자 하는 모든 감각들, 그 모든 것은 사실 현실에서 용이하다. 그것을 애써부정하고 자꾸 미래로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우리가 낭만적이라 느낄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을 굳이 부정하고 거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코 모든것이 꿈같진 않더라 라고 실망하는 순간만 영리하게 피할 ..
빌니우스의 10월과 뻬쩨르의 4월 세수를 하다가 살짝 젖은 소매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요즘. 더이상 커피를 시키면서 얼음이 채워진 유리잔을 부탁 할 필요가 없어졌고 카페 바깥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위에는 아침에 내린 빗방울이 달리 어디로 굴러가야할지 몰라 그저 고여있는 그런 형상들. 새벽 햇살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여전히 지저귀는 새들이 있어서 좋다. 통상 이곳의 겨울 난방은 10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 낮 기온이 10도 정도로 3일간 지속되면 시작되지만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뚝 떨어지다가도 어느날은 낮기온이 15도를 넘겨버리는 중이라 빌니우스는 아직 난방을 망설이는 분위기이다. 4월의 중순 정도, 이제는 난방 끌만도 해 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장장 6개월간 지속되는 난방이니 만큼 벌써부터 ..
아주 오래 전에 우리 엄마 세대들이 혼수로 장만해오곤 했다는 카스텔라 제빵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간혹 엄마가 만들어주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이사를 가면서 버리신 건지 그 이후론 먹은 기억이 없다. 엄마가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거품을 내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는지 언젠가 친구와 그걸 해 먹겠다고 프라이팬에 따라 하다가 친구 집 가득 연기를 피웠던 적이 있다. 폭신한 카스텔라 대신 달걀 우유 밀가루가 섞여서 질척하게 익은 반죽을 먹었다. 이 음식은 식빵을 토스트 해서 알맞은 크기로 잘라 쌓아 올린 후에 그 위에 달걀과 바닐라 익스트랙트를 넣고 섞은 우유를 식빵이 잠기도록 붓고 물이 담긴 용기 위에 오븐 용기를 넣어서 구우면 된다. 맨 아래 조금 덜 익은 곳에서 친구와 만들었던 그 카스텔라 맛이 났다.
라일락 어린이 도서관에 카드 게임이 여러가지 있는데 동물 발바닥 연결하기, 수십 종의 고양이 연결하기, 영화 주인공과 영화 연결하기 등등 여러가지 시리즈에 이어 꽃 관련 카드도 나타났다. 이 카드 자체의 촉감도 말랑말랑하고 혹시 향기가 나는 기적이 일어날지 몰라 꼬 끝에 대 봄. 몸은 여전히 추운채로 손 안에 가득 쥐어진 꽃 카드들이 정말 화사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리투아니아어로 올리브를 알리부아게 alyvuogė 라고 하는데. uogė, uogas는 열매, 베리 뭐 그런 단어로 쓰이니깐 풀어 말하면 alyva 나무의 열매라는 것이다. 게다가 리투아니아에서는 라일락을 alyva 라고 부른다. 그게 항상 이해가 안됐는데 실제로 라일락이 올리브 계열이란다. 라일락의 고향은 발칸 반도라고. 라일락 꽃과 연결되는 그..
수수부꾸미 지금 생각해보니 오래 전에 부모님이 명절을 쇠러 가시면 시골집에서 항상 얻어 오시던 새하얀 찹쌀 음식이 부꾸미였다. 팥이 들어있진 않았고 기름에 지지면 쩍쩍 늘어지던 그 음식을 조청에 찍어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팥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 서울에서 처음 먹어 본 수수 부꾸미는 정말 신세계였다. 아마도 그런 식감을 좋아하나보다. 빌니우스로 돌아오던 날, 트렁크를 집에 들여놓자마자 가방을 열어 선물 받은 냉동 부꾸미를 냉동실에 집어 넣었다. 조청이 없어서 시럽을 뿌렸다.
순두부찌개 돌아오기 전 날 저녁 엄마가 끓여준 순두부 찌개를 보니 돌아와서 처음 끓였던 어떤 국이 생각난다. 고깃국을 끓이다가 간장을 좀 넣었는데 맛이 시큼해졌다. 뭘까. 싸구려 간장이라서 그런가. (키코만 간장이 아니면 대부분은 좀 구리다. 하인즈가 만든 간장도 예외는 아니다.) 혹시 무가 상했던건가. 고기가 상했나? 차라리 간장을 더 넣어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서랍을 열고나서 간장 대신 발자믹 식초를 넣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커다란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몰랐다.
롱샹으로 심심해서 아마존 탐험을 하다가 책 한권을 샀다. 서울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시회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아 베를린에서 베를린 버전 위니테 다비따시옹을 마주하고 온 감동이 가시지 않는 와중에 그 여운을 무한으로 지속시켜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교보문고의 원서코너 땅바닥에서 시작된 밑도 끝도 없는 애정을 좀 더 학구적인 아마추어의 탐구 자세로 바꿔야겠다는 욕구도 생긴다. 사실 르 코르뷔지에를 기념하기 위한 모뉴먼트 하나를 보고 인도로 떠났기에 이 건축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할 수 있는 더 이상의 방법을 모르겠지만 특별히 의도치 않았어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실재의 그를 맞닥뜨리는 기회가 생기는것 그 자체에 고무되는것 같다. 이 책은 르 코르뷔지에 말년의 역작 롱샹 성당에 관한 책인데 얼핏 한국의 살림지식..
쓸데없는짓 세살 아기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다. 선물로 뭘 살까 고민하다가 마침 초대받은 놀이방 근처에 러시아 서점이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리투아니아어를 문제없이 구사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친구들이다. 러시아 동화책 한권과 공주가 그려진 키재는 긴 도화지를 사서 계산대로 걸어 가는데 작은 사전이 보였다. 러시아어-독일어 사전이었다. 몹시 가볍고 심플했고 언젠가 뻬쩨르부르그에서 산 그러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작은 러시아어 사전이 생각나 덥석 집었다. 회색 바탕에 독일 국기를 모티프로 한 커버는 여지없이 베를린을 떠오르게 한다. 무뚝뚝한 독일 작가가 썼을법한 세워놓은 가구같은 여행 수필의 느낌, 왠지 사용 빈도와는 상관없는 작자의 개인적인 단어들로 가득할것 같은 사전이다. 사전사는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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