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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달력 한 장. 헌책을 읽는 경우 이전 책 주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특정 부분에 줄이 그어져 있거나. 메모가 되어있거나. 날짜와 함께 건넨 이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고 직접 산 책에 대한 기대 같은 것도 간혹 적혀 있다. 책을 팔았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책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않는 책이란 사실 없다. 나도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많진 않지만 가지고 있던 책을 대부분 팔고 왔지만 어떤 책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거리 도서관에서 가져오는 책들도 자신들의 사정이 있다. 며칠 전 카페 가는 길에 발견해서 카페로 데려간 톨스토이의 부활은 리가에서의 추억이 담긴 책인가 보다. 반갑게도 그 속엔 뜯어서 간직한 달력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비 오는 날에 길거리에서 열어 봤으면 아마 나풀나풀 떨어..
비 내린 다음. 윗줄은. 카푸치노와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도나스. 아랫줄 왼쪽으로부터는. 카페에서 읽으려고 가져 간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인상기. 카페 가는 길목에 있는 거리 도서관에 있길래 습관적으로 집어 온 톨스토이의 부활. 카페에 비치되어있던 빌니우스 관련 계간지 순이다. 이들이 모두 우연인데 어떤 면에서는 비교할 구석을 주었다. 따끈따끈한 계간지는 늘 그렇듯이 빌니우스가 발굴해서 기억하고 지켜나가야할 가치가 있어보이는 과거의 것들에 대한 감상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부활은 보통 카츄사와 네흘류도프가 법정에서 조우하는 순간까지는 나름 생명력있는 서사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읽지만 그 이후부터는 뭔가 새로움을 주입하며 혼자 앞으로 막 내달리는듯한 느낌에 오히려 마음속은 정체된듯 오글거린다. 겨울에 쓴 유럽의 여름 인상기는..
돌고 돌아 집으로 묻지도 않은 정보를 친절하게 나열하는 사람들이 있고 더 알려줬으면 싶지만 딱 물어본 만큼만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간혹 물어봐도 잘못 알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묻는 것을 주저하기도 하고 거짓임이 분명할 것 같은 대답도 믿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내치지 못할 때가 있다. 엉터리 같은 질문에 나름의 좋은 대답을 했다고 만족하는 빈도가 있어 보이는 질문에 잘못된 대답을 한 것 같아 찝찝한 경우보다 훨씬 많아진다. 남을 향한 질문은 현저히 줄어든다. 스스로에게 내뱉는 질문은 늘어난듯하지만 답변은 미룬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텅 빈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왠지 이 버스를 타야 할 것 같은 느낌에 그냥 올라타서는 기사분에게 중앙역까지 가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버스는 정..
영원한 휴가, 멋진 영화들은 어떤 장면에서 멈춤 버튼을 누르든 전부 명장면이지. 아주 오래전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정말 정말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랬었다. 텅 빈 거리의 삐딱한 정적과 밤새도록 이곳저곳을 떠돌다 아침이 되어 겨우 잠들어가는 중의 퀴퀴함이 화면을 뚫고 전해졌으니 그것은 당시의 나에겐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어서 오그라듬은 오히려 아방가르드하게 보일 뿐이었고 값싼 철학을 롱테이크로 읊는 게으름뱅이의 배회는 저렇게 살아도 살아지는 삶에 대한 은근한 공감과 안도를 불러일으켰다. 삶은 정말 이렇게도 살아지고 저렇게도 살아지는 놈일 뿐인 것이다. 인간에게 더 이상의 오글거림을 포기하고 세상에 대항하여 자신의 모든 행동을 계면쩍어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는것이라면 그 시기는 아예 늦거나 영원히 오지 않아..
토마토 모리스 모리스라는 이름의 보라색 토마토가 팔길래 한 개 사와서 먹었다.
1월의 핫초콜릿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 중에 스모우크핫커피리필 이란 노래가 있다. '스모우크.핫.커피리필, 달이 뜨지 않고 니가 뜨는 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그런데 유독 커피도 아닌 핫초콜릿을 마실 때 이 노래가 보통 떠오른다. 하루하루 가장 짙은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12월에 온 정성을 다해 끓이는 한 잔의 핫초콜릿은 남아있는 온 겨울을 녹여줄 듯 짙고 따뜻하지. 그래서 1월만 되어도 별로 맛이 없는가 보다. 그러니 이것은 오히려 약발이 떨어진 핫초콜릿 속에 달 대신 떠오른 예쁜 마쉬멜로우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2021 년의 햇살 낮이 급격히 짧아지고 어둠이 어둠 그 이상으로 어두워져서 이 시각 이 계단에 내리쬐던 이 햇살을 보려면 해를 넘겨서도 더 많이 기다려야한다. 그 순간을 계절과 시간으로 특정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아 이 느낌이었지!' 하고 어떤 기억이 온 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순간에 도달하려면 사실상 딱 저 자리에 위치하는 순간과 함께 아주 까다롭고 미세한 조건들이 충족 되어야한다.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전선들 아래로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을 따라 오래된 먼지와 담배 꽁초가 나뒹구는 계단이지만 층계참에 남쪽 건물 마당을 향해 내어진 창은 여지없이 이 햇살을 끌어와선 단단히 붙들어 놓는다. 이와 비슷한 풍경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살아갔을법한 사람들이 등장했던 많은 이야기들. 오래 전 그들로부터도 어쩌면 크게 달라..
몇 권의 책 2년 전쯤인가. 문득 올해 이즈음에 뻬쩨르에 가게 된다면 참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구시가에 헌책방이 많은데 러시아어 책들이 꽤 많아서 돔끄니기 간다는 느낌으로 가끔 찾아간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온 사방 책을 누비며 기어 다니는 어떤 책방에서 지난달에 발견한 몇 권의 책들. 마치 어린이 도서관에 제일 찾기 쉽게 생긴 안데르센이나 그림 형제 동화 모음집처럼 두껍고 큰 판형의 책은 '죄와 벌'과 '가난한 사람들', '아저씨의 꿈'이 함께 수록되어있는 독특한 조합의 책이고 두 번째는 그가 보낸 서신의 일부를 모아놓은 책. 그리고 마지막은 겉표지의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왔던 '멸시받고 모욕당한 사람들'. 이 책은 오래전 리투아니아어로 꾸역꾸역 날림으로 읽고 비교적 최근에 한글로 다시 읽어서 느낌이 남달랐다.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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