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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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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dive 이런 표현은 좀 뭐하지만 이들의 음악이 돼지 비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태우다보면 그저 투명해진다. 후라이팬 온 사방에 미끈한 흔적을 남기고. 시간이 지나면 나 몰라라 다시 굳지. 그리고 아주 작은 열기에도 또 다시 부정할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며 돌돌 굴러다닌다. 보통 기분이 없는 상태에서 즐겨 듣지만 어떤 감정 상태에서 듣기 시작하느냐와 상관없이 항상 내가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의 원형으로 나를 되돌려 놓는 음악. 분주함속에서 끊임없이 정화되는 투명한 사운드. 지칠틈을 주지 않고 어딘가로 데리고 가는 음악. 내년에는 이들의 작은 투어라도 한 군데 가볼 수 있게된다면 좋겠네 문득.
Vilnius 68_19시 57분 Vilnius_2018 겨우내내 어둠을 뚫고 귀가하는 것이 발목에 엉겨붙는 질겅한 눈만큼의 피로감을 주었다. 겨울의 추위는 온도계를 지녔겠지만 그 어둠의 채도는 너무나 한결 같아서 겨울이 추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순전히 그가 어떻게도 해결 할 수 없는 어둠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계절은 그 어둠을 이를 악물고 빠져나온다. 삽으로 파헤쳐지고 발로 다져짐에 쉴틈없는 놀이터 모래 상자속에 보란듯이 고개를 치켜 세운 잡초 한 가닥처럼. 그리고 그 오기가 빚어낸 설익은 계절의 가파름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허무함을 뿌리치지 못했다. 겨울을 좀 더 나른하게 보내면 봄이 좀 덜 무기력하게 느껴질까. 오후 8시 남짓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머타임의 시작으로 4월들어 급격히 밝아진 저녁과 길어지는 낮...
Vilnius 67_어떤 건물 2 Vilnius_2018 리투아니아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기능도 외양도 각기 다른 이 세개의 건축물을 앙상블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나는 줄곧 이들을 대학 앙상블이라고 부른다. 매번 이 위치에 서서 이들을 보고 있자면 결국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놓여져서 고통과 영화를 주고 받았던 이웃일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가장 오른편에 있는 대통령 궁은 뻬쩨르의 겨울 궁전을 복원한 러시아 건축가 바실리 스타소프의 작품이다. 빌니우스에 발을 들여 본 적 없는 건축가는 뻬쩨르의 어디쯤에서 실제 건축 부지 보다 큰 건물을 설계 했고 결국 건물은 건너편 빌니우스 대학 담벼락을 허물고 거리를 좁히면서 설계도 그대로 지어졌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 위치에서 대학 도서관 건물 끄트머리에 놓..
Vilnius 66_어떤 건물 Vilnius_2018 겨울 햇살이 따가운 추위를 뚫고 거리 거리 차올랐던 날, 고요했던 건물들의 마당 구석구석 햇살에 녹아 내리는 물방울 소리가 가득했다. 돌아오는 봄은 다음 겨울을 위해 더 할 나위 없이 응축된 짧은 정거장, 의도한 만큼 마음껏 바닥으로 내달음질 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 아름다운 곳들은 늘상 조금은 우울한 마음으로 누비고 싶다. 구시가지 곳곳에 바로크식 성당들이 즐비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나의 성당에서도 두세개의 건축 양식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빌니우스이다. 화재로 불타 버린 목조 건물 터에 벽돌을 쌓고 전쟁, 전염병으로 그마저도 파괴되고나면 남은 벽돌 위에 다시 돌을 얹고 바르고 칠하고 새기며 어떤 시간들은 흘러갔고 그만큼 흘러 온 역사를 또 복개하고 걷어내면서 옛 흔적을..
빌니우스 카페_ELSKA coffee 지난 여름 자주 갔던 카페. 아마 빌니우스내에서 일조량에선 단연 일등일 카페. 한국에서 돌아와보니 그리고 다시 베를린에서 돌아와보니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 베를린 카페스럽게 떡 하니 버티고 있었던 카페. 이곳의 커피는 한국에도 분점이 있다는 베를린의 보난자 카페의 에스프레소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이 자리는 원래 전시 공간을 겸한 수공예 품을 파는 넓은 갤러리였는데 갤러리의 공간 자체는 줄어들었지만 카페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내부 공간은 개인적으로는 편안한 느낌을 받지 못해서 야외 테이블이 있던 여름에만 집중적으로 갔다. 겨울이지만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맑은 1월 같은 경우 이곳의 야외 테이블은 충분히 앉아 있을 만 할 것이다. 날씨를 탓하지 않고 투박하고 정직하게 옷을 잘 차려만 입..
빌니우스 카페_Caffe italala 곧 카페가 생긴다는 암시만큼 기분좋은 일이 있을까. 장사가 안되서 가게를 접어야 했던 어떤 이의 눈물은 나몰라라 하고 개업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누군가의 싱싱한 함박웃음을 떠올리며 결국은 희열에 젖고 만다. 지난 달 길을 걷다가 마주친 미래의 카페. 보통 문을 열기 전에 점포를 가리고 수리에 들어가면 Jau greitai, Comming soon 과 같은 문구를 붙여놓는 법인데 이 미래의 카페는 Dažomės! (페인트 칠하는 중) 라는 독특한 문구를 붙여놓았다. 카페 인테리어에 들어갈 색상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존의 빌니우스 카페 인테리어에도 잘 사용하지 않는 색감에 말 그대로 열심히 막바지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센스있는 문구에 가봐야지 하다가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친구들 여럿과 토요일 아침 커피를 마..
My summer in Provence_ Rose Bosch_2014 한국어로는 러브 인 프로방스로 번역된 영화. 영어 제목에는 사랑 대신 여름을 프랑스어 제목에는 미스트랄이 들어간다. 사실상 한정된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다 사랑도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여름도 거센 미스트랄도 어느것 하나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느낌이다. 양 옆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비포장 도로를 막무가내로 달리는 트럭 기사에게 조금 천천히 달려주세요 하는데 운전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속도를 밟는 듯한 느낌, 기분좋게 물컹거리며 입속에서 퍼지는 올리브 향기를 기대하다 덜 익은 올리브를 깨문듯한 느낌, 씨가 제거되지 않은 올리브 통조림을 스스로 선택해놓고도 으례 씨 없는 올리브인줄 알고 먹다가 이 사이에 매몰차게 들어차는 올리브씨에 화들짝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올리브는 항상 덜 익었..
리투아니아어 50_채식주의자 Vegetaras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리투아니아어로도 번역되었네. 나는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고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맨부커상 수상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고 뭔가 김영하의 데뷔작을 영화화 한 느낌이 물씬 나는 저예산 영화였음.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여성형 명사로 표기 되었다. 영문판을 리투아니아어로 번역했겠지 했는데 리투아니아인이 한국어에서 바로 번역했다. 도서관에 있으면 한번 빌려서 읽어봐야겠다. 채식주의자는 베게타라스 Vegetaras, 비건은 베가나스 Veganas. 로푸드 먹는 사람들은 쟐리아발기스 Žaliavalgis. 단어들이 뭔가 그리스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