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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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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29_카펫 Kilimas 작은 썸네일 이미지만 보면 얼핏 브뤼겔의 그림 같은 이 사진은 엄밀히 말하면 풍속화가 맞다. 겨울이 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보다 더 정겹게 담은 사진이 있을까. 사진은 아마 러시아 어디쯤이겠지만 좀 더 오래전엔 빌니우스에서도 충분히 익숙한 풍경이었을 거다. 단조로운 놀이기구와 건물, 우샨까를 쓴 할아버지, 눈에 파묻힌 자동차들. 아마도 지금 빌니우스의 흐루쇼프카 계단에서 카펫을 끌고 눈 쌓인 놀이터를 향하는 할머니는 보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다음 장면..이들은 아마 토요일 아침부터 누군가가 카펫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소리를 듣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을 거다. 각자의 카펫에서 발생하는 굉음에 서로서로 묻어가며 겨울 먼지와 작별하는 의식. 나도 저걸 한번 해봤는데 효..
리투아니아어 128_지하도 Požeminė perėja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성별 막론하고 대개 그렇지 않을까. 먼발치의 지하도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괜히 좀 기분이 나빠진다. 빌니우스에는 유명한 지하도들이 몇 군데 있고 소련시절의 주거 단지 흐루쇼프카들이 몰려있는 지역에 주로 많은데 확실히 범죄 취약 지역의 이미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빌니우스의 지하도가 공사에 들어가면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다. 우선 밝은 조명들이 대폭 늘어나고 기존의 낙서와 욕설, 소모적인 그래피티 대신 밝고 긍정적인 벽화들이 채워진다. 이 지하도는 구시가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대형 전시장 근처에 있는데 입구는 여전히 사나워보이지만 오랜만에 가니 밝은 조명아래에 우크라이나 전쟁 사진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조명은 밝아졌지만 우크라이나의..
더 캐니언 (Gorge, 2025)-리투아니아어하는 안야 테일러 조이 지난 2월 16일은 리투아니아의 독립기념일이었다. 평소처럼 동네의 리투아니아 병무청 입대 독려 문구를 보며 귀가했다. 주거지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병무청의 창가를 휘감은 노란 램프의 조명들은 쓸쓸하게 여전히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날 새롭게 업로드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의 마일즈 텔러와 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이마를 맞대고 있다. 레비(마일즈 텔러)는 특급 스나이퍼들의 서사가 늘 그렇듯 잃을 것 도 지켜야할 것도 없는 고독한 미국인 특수 요원으로 나온다. 그는 악몽을 꾼 다음날 아침 언제나 그렇듯 여자 상사의 사무실로 불려 나간다. 예상대로 국제통화기금 총재처럼 엄격하지만 우아하게 나이 든 고위 공무원 시고니 위버가 기다리고 있다. 촌각을 다투는 비밀 단체의 고위관계자..
리투아니아어 127_탄핵 Apkalta 한국이 리투아니아 언론에 등장하는 경우는 보통 북한과 관련해서이다. 애석하게도 북한의 김정은이 또 나름 월드 스타이기에. 그래서 아마 한국의 대통령은 김정은을 뛰어넘는 인지도를 얻고 네타냐후와 푸틴, 트럼프를 밀어내고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다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슈퍼스타가 되지도 못했다. 아무도 이 빌런의 서사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른다. 대통령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골든 라즈베리 트로피 정도...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그나마 개인적으로 유익한 점이 있다면 리투아니아 언론에 비교적 신속하게 한국 소식이 올라와서 관련단어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 물론 BBC 등 여타 해외 유명매체들의 기사들이 재전달 되는 정도이긴 하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으며 ..
리투아니아어 123_Konteineris 컨테이너 찾는 책이 동네 도서관에 없어서 오랜만에 국립 도서관을 향하는 길. 버스 정류장 뒤로 헤드셋을 낀 여인이 온갖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나른하게 앉아있다. Neieškok kampo, ieškok spec.konteinerio! 구석을 찾지 말고 전용 컨테이너를 찾아! 컨테이너 Konteineris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여러 용도로 쓰이는 단어이지만 대개 일차적으로 쓰레기 컨테이너를 떠올린다. 전자 폐기물을 애꿎은 곳에 버리려고 애쓰지 말고 전용 컨테이너를 찾아서 버리라는 내용의 벽화인데 그런 전용 컨테이너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이 벽화는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 알고 보니 이 헤드셋 여인의 원형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Portrait of Madame Récamier이라는 그림 속의 여..
리투아니아어 118_비율과 관계 Santykis 마들렌의 핵심은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들어간다는 것. 적어도 내가 가진 레시피에서는 그렇다. 물론 반죽에 이것저것 추가하고 위에 부어서 바르고 뿌리고 한다면 그런 단순한 공식은 성립되지 않겠지만 그저 수더분한 마들렌을 원한다면 모든 재료의 양은 1이란 숫자로 통일된다. 홍두깨 선생님이 하니한테 지어주던 흰 밥도 쌀과 물의 비율은 아마 1이었을 거다. 리투아니아어 단어 Santykis는 비율의 뜻도 있지만 재밌게도 '관계'의 의미도 가진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노사관계 등등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관계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이상이라면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이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합쳐져서 달콤한 마들렌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는 좀 벅차오르는 지점이 ..
리투아니아어 117_고기분쇄기 Mėsmalė 그런 물건들이 있다. 딱히 실용적이지 않지만 버리기엔 무척 애매해진 것, 꺼낼 때마다 오래된 이웃들과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 카다시안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것,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편리하게 잊는 것, 그 생애와 본적을 알고 싶어 절로 거꾸로 들어 밑바닥을 보게 하는 것, 한때는 모두에게 새로웠던 것,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별안간 폄하되는 것, 잊으려고 마음먹으면 걷잡을 수 없이 소멸되는 것. 그게 뭐 물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동안 파네베지에 있으면서 소련 시절의 오래된 고기분쇄기로 커피를 갈아 마셨다. 바닥에 쓰여진 대로라면 러시아어로 먀싸루프까Мясорувка, 리투아니아어로는 메스말레 Mėsmalė 라고 한다. 탁자에 고정시키고 손수 돌..
리투아니아어 116_목록 Sąrašas 마트에 가서 바구니를 집으려고 보니 옆바구니에 남겨진 쪽지 한 장이 보인다. 그래서 그 바구니를 집었다. 이 쇼핑 리스트의 주인은 이 식품들을 전부 샀을까. 필기체를 썼고 복수를 잘 썼고 찍어야 할 곳에 점을 잘 찍었다. 긴 단어는 적당히 줄였고 파프리카에서는 망설였다. 대체로 자주 반복되는 기본 식품들을 사러 아주 일상적으로 마트에 왔다. 냉장고에 항시 있어야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목록을 작성했을거다. 가령 이것은 어른 아이 다같이 오랜만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토요일 오전을 위한 리스트 같다. Pirkinių sąrašas - 쇼핑 리스트 Pienas 2 vnt - 우유 두개 Graik.jogurtas - 그릭 요거트 Užtepėlė - 스프레드 Duona Batonas - 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