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리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다 보면 구시가를 한 꺼풀 감싸며 돌다가 외곽으로 빠지기 전의 트롤리버스들이 정류하는 곳마다 거의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적당히 위장을 채우고 집을 나선 나에게 이 카페들이 너의 나른한 위장을 우리집 카페인으로 깨워주겠다며 트롤리버스 창문 너머로 손짓하는데 나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두 정거장 정도 타고 가다 내려서 잠깐 앉아서 커피로 속을 헹구고 다시 남은 다섯 정거장을 타고 가던 길을 가곤 한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우즈가베네스 축제도 지났는데 날씨가 더 추워졌다. 진눈깨비가 짙게 내리던 날, 이른 아침이지만 마치 지정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사람들로 이미 반 정도 채워진 카페에 나도 자리 잡았다. 아침에 혼자 일하는 직원은 일손이 모자른 가운데에서도 역시나 침착하다. 재촉하는 이도 없다. 에스프레소와 미니 도넛을 주문했다. 컵이 없어서 물은 가져오지 못했다.
스푸르기떼 Spurgytė는 스푸르가 Spurga의 지소체인데 보통의 도넛을 스푸르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리투아니아식 스푸르가는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찹쌀 도넛과 비슷하다. 코티지치즈와 밀가루와 설탕을 섞은 반죽을 기름에 튀겨낸다. 이 카페의 미니 도넛은 찰떡 아이스보다 좀 작다. 라즈베리 들어있는 던킨 도넛 식감에 속에는 연유와 바닐라를 섞은듯한 크림이 들어 있다. 이곳의 에스프레소와 이 미니 도넛도 한 모금 한 조각 커플로 과하지 않고 깔끔하다.
겉옷을 벗어서 걸쳐놓고 커피를 앞에 두고 앉는데 마치 나 좀 들어달라는 듯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Venus in furs 가 흘러나왔다. 바깥으로는 빨간 트롤리버스들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영화 레토에 보면 빅토르 초이랑 나타샤가 커피가 담긴 커피잔에 받침까지 받쳐서는 승객으로 가득 찬 트롤리버스에 올라타는 장면이 있다. 그때 트롤리버스에서 승객들이 러시아 억양을 가득 담아 한 소절씩 나눠 부르는 노래가 이기팝의 Passenger 인데 이 영화 특유의 뭔가 황망하고 아련한 기운은 물론 빅토르 초이와 그의 음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비슷한 시대의 이런 그룹들의 이런 노래들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지금도 듣고 있으면 오래전 음감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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