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아련하고 신비로운 동전 속의 이것은 거뜬히 10원짜리 속의 다보탑과 자매결연을 맺을 수 있을듯한 모습이다. 마트에서 라임 3킬로를 사면서 거슬러 받았고 AAA 사이즈 에너자이져를 사는데 쓰이며 어딘가로 영영 떠나버린 이것. 넌 널 위해 살거라.
그 옛날 화산 폭발로 사라졌거나 오스만 투르크에서 박살 냈거나 왠지 왕좌의 게임의 피의 결혼식 같은 대량살상이 이곳의 돔 아래에서 벌어졌을 것만 같다. 어쩌면 정어리를 잡던 시칠리아의 소년 어부가 가라앉은 배에서 발견한 명문가의 도장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를 때에 이런 생각을 한다.
한껏 줌을 당겨 간직하는 동전들의 모습은 대체로 평면적이지만 햇살을 받는 동전은 시시각각 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이 동전의 첫 인상은 인상파 화가가 그린 풍경화 같았다. 번잡한 19세기 파리 거리가 자리 잡은 도화지의 가장 먼 부분에서 다른 고도를 응시하는 외톨이 성당 첨탑처럼 고고하다.
아를의 평화로운 풍경이나 타히티의 여인들, 흩날려 사라져버릴 것 같은 발레리나들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보다는 실연당한 위트릴로가 흐린 오후의 언덕에 올라 그렸을법한 찌뿌둥하고 의기소침한 도시의 모습들이 훨씬 좋다. 왜일까. 19세기 후반이든 21세기든 나에게 도시는 현대적이고 역동적일 때보다는 음울하고 병약한 이미지를 내보일 때 가장 그 다워보인다는 것.
하지만 이 모든 열거와 상관없이 이것은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몰레 안토넬리아나 Mole antonelliana 라는 19세기 마천루이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이탈리아는 마치 뜀틀 착지에서 매트리스를 한참 벗어나 폭망해도 개인 종합 1위를 하는 체조 선수 같다. 그리고 유서 깊은 이 옛 도시국가는 그런 선수를 열댓 명은 거느린 드림팀이다. 실제로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이탈리아라고 하니 유적들이 군웅할거하는 이탈리아에서 당당히 2센트 동전에 자리 잡은 이 몰레 안토넬리아나라는 생소한 건축물이 역으로 노장 체조 천재들이 르네상스를 이루는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뜀틀 신동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빈치의 비투루비안 인체비례도나 보티첼리의 그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등 동료 이탈리아 동전 이미지들의 평균 연령을 떠올려도 토리노의 이 건축물은 심지어 고작 19세기생으로 아주 새파랗게 젊다. 이탈리아는 그 많은 유명한 건축물을 놔두고 왜 굳이 이 건축물을 동전에 새긴 걸까.
몰레 안토넬리아나는 알레산드로 안토넬리라는 건축가가 1863년부터 1889년까지 26년에 걸쳐 열심히 만들었다. 그는 정작 건물의 완공 1년을 앞두고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26년이라면 자신의 인생 한 토막을 기꺼이 쏟아부었으니 그의 이름에 헌정된 듯 보이는 건물 이름도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건축가 안토넬리는 노년에 토리노 건설 현장에서 꼼짝 않고 앉아 이 건물을 금지옥엽 했을까. 어쩌면 여름휴가를 얻어 아말피 해변으로 떠난 그가 겨울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서 혹은 건설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켜서 건설이 무기한 연기되었을 수도 있다. 19세기의 26년은 모든 것이 그저 순조롭기엔 너무 긴 기간이었을 테니.
실상은 이렇다. 유럽 어디에서든 오래전부터 유태인들은 사회적 경제적 제약을 받았고 토리노의 유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토리노의 일반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보장받기 시작하는 1846년 토리노의 유태인 커뮤니티는 그들의 시나고그를 짓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모은 돈뭉치를 들고 건축가 안토넬리를 찾아간다. 그래 그 정도 돈이면 내가 시나고그 정도는 지어줄 수 있다고 안토넬리는 흔쾌히 수락하는데 17세기 건축물에 돔을 올리고 첨탑을 추가 설계한 전적이 있는 안토넬리는 아마 자신의 전작을 뛰어넘을 높이의 시나고그를 짓고 싶었나 보다. 결국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50미터는 족히 넘는 높이의 돔이 설계도에 얹어지고 초기 투자 비용보다 2배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끝이 나지 않는 공사에 애가 타기 시작한 유태인 커뮤니티는 시나고그 완성을 포기한다. 그리고 토리노 시가 유태인들로부터 건축 부지를 사들이면서 우여곡절 끝에 건축물이 완성된다. 결국 이 건물은 시나고그 대신 이탈리아의 통합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어 19세기 후반부터 토리노의 랜드마크가 된다. 토리노는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자국에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도시라고 한다.
2006년 펜싱 선수권 대회 로고였다는데 몰레 안토넬리아나의 첨탑을 겨냥하고 있다.
토리노 동계 올림픽 엠블럼은 하늘과 눈을 상징하는 파란색 크리스털들이 몰레 안토넬리아나의 형태로 모여있다. 토리노는 이 건물을 정말 자신의 상징으로 여기는 게 맞는 것 같다.
토리노하면 쇼트트랙을 연결 지을 수 있을 만큼 동계 올림픽의 이미지가(만) 강한데 사실상 나는 단 한 번도 이 도시를 알프스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탈리아는 엄연히 따뜻한 남유럽의 해양 국가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동전 담당 브레인들은 토리노를 통해서 은근슬쩍 알프스에 대한 자신들의 지분을 내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프스가 병풍처럼 펼쳐진 토리노에서 동계 올림픽씩이나 열렸는데 알프스 하면 하이디와 요들송, 생수만 떠오르다니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까짓 포지타노의 해변 말고 난이도 최상 해바라기 벌판 퍼즐 같은 토스카나 말고 시칠리아며 곤돌라며 마르게리타며 엑스트라 버진 오일이며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 먹은 그런 계단 같은데 말고 우리에게도 명산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혼자 상상해 본다.
업계 지명도 1위를 점한 프랑스의 생수회사는 몽블랑을 당당히 물병에 그렸고 자신들의 만년필에 프랑스식 이름을 붙여 열심히 팔아먹는 독일인도 있는데 몽블랑의 이탈리아식 발음인 몬테 비앙코는 그저 아이스크림 이름 같을 뿐이니 이탈리아의 알프스를 인식하지 못했던 게 좀 미안하기까지 했다. 비정상회담이 완전 초창기에 원년 멤버들로 가장 재밌고 반짝였을 때 이탈리아인 알베르토가 사뭇 억울하고 호소력 짙은 어조로 했던 말이 의미심장하게 스친다. '프랑스는 마케팅을 잘해서 그런 거예요.'
이 몰레 안토넬리아나의 건물 내부의 정중앙에서 수직 85미터에 위치한 전망 테라스까지 돔을 뚫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전망이나 일출 구경에 인색한 나에게도 인상적이다. 은은한 조명의 건물 내부에서 사방이 유리로 되어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알프스가 휘감고 있는 토리노 시의 가장 높은 야외 전망대를 향해 나가는 느낌은 어쩌면 좁고 오래된 파리의 지하철이 지하의 어둠을 헤치고 달려 갑자기 멀리 라데팡스가 보이는 지상으로 나왔을 때 가슴이 뻥 뚫렸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영상을 찾아봤는데 사실 그런 드라마틱한 느낌은 아쉽게도 영상을 통해선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그냥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사방이 철골구조로 막힌 전망대일 뿐이다. 하지만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한 건물 내부를 저런 엘리베이터가 수직 상승하는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먼발치의 안토넬리아나는 피렌체의 두오모만큼 토리노시를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알프스 산이 보이는 것이 피렌체 두오모와의 차이라면 차이겠다. 아마 뺨에 스치는 공기도 피렌체의 그것보다는 서늘할 것이다.
이 건물은 1889년 완공 당시에 167.5미터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들이 늘 그렇듯 그것을 한정하는 조건은 아주 다양해질 수 있다. 몰레 안토넬리아나는 같은 해에 건축계의 이신바예바 같은 에펠탑이 나타나 200미터대를 가뿐히 건너뛰고 300미터까지 솟구치기 전까진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나 1908년까지 그 타이틀 유지가 가능했는데 왜냐하면 이 건물이 철골구조를 사용하지 않은 순수 벽돌을 쌓아 올려 축조된 건물 중에선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타이틀을 전부 다 내려놓은 지금은 국제 영화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박물관'의 타이틀을 유지 중이다. 그러니 이 박물관 속에 카페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박물관 속에 있는 카페'가 되는 셈이겠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영화 박물관답게 안토넬리가 굳은 의지로 얹은 돔을 각종 이벤트에 적극 활용하는 모습.
그리고 찾아 본 대부분의 박물관 내부 사진에 아누비스와 람세스를 반씩 섞어 빚은 듯한 이런 친구가 쩍벌을 하고 앉아있다. 침침한 조명 때문인지 약간의 습도도 느껴지고 쇠사슬과 번쩍이는 금색으로 치장되어 무서워 보이고 싶었으나 전체적으로는 해학적일 뿐인 이 포스도 약간 실내 놀이 공원 장식 같은 것이 초등학교 때 단체로 롯데월드 후룸라이드 탈 때 그 축축한 내부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 분이 왜 굳이 이곳에 앉아있는 것인지 또 친절한 설명이 있길래 읽어본다.
바로 카비리아 Cabiria 란 이탈리아 무성 영화에 등장하는 몰록이고 보기 좋게 불태워지고 있다. 친절하게 전체 영상이 링크가 되어있는데 이것이 무성 영화이고 세트에서 촬영된 재난 영화인지라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거의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허둥지둥 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참 재밌다. 이것은 1914년에 토리노 현지에서 촬영되었고 엉뚱하게도 백악관에서 최초로 상영된 영화라고 한다.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던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카비리아라는 여자 아이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려진다. 얼마 전에 분출한 시칠리아의 그 에트나 화산이 이 영화에서도 분출하는 것임.
이 정도면 굴러들어 온 동전 하나로 또 얼떨결에 토리노에 대해서 다소나마 알게 되었으니 그만 정들고 넘어가려는 찰나에 튀어나온 이 음료수는 알고 보니 토리노의 자랑, 토리노의 시그니쳐 커피 음료 비체린이란다.
이미지상으로는 약간 따뜻하게 데운 스타우트 맥주 느낌이 들어서 어디 더블린의 237년 된 펍 같지만 레이디 핑거로 인해 미량의 이탈리아 스러움 확보. 좀 찾아보니 이 도시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하는 커피 맞는 것 같은데 역시 알베르토 몬디의 지적처럼 마케팅 능력이 결여되서인지 한 번도 이 음료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놀랍다. 개인적으로는 이 명칭이 브체라 붸체라의 어감이라서 더 정감이 간다. 작은 잔을 뜻한다는 비체린 잔의 가장 아래에 핫초콜릿을 카펫처럼 깔고 에스프레소라는 담요를 덮은 후 푹신푹신한 쿠션 같은 휘핑크림에 기대어 이 핫초코 에스프레소 크림 조합의 커피를 한 겨울 토리노에서 마시는 상상. 카페 모카나 초콜릿 시럽을 추가한 뜨거운 아포가토의 맛일까 어림짐작하며 굳이 만들어본다.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으면 한 번에 끝날 일이지만 없으므로 모카 포트로 에스프레소 추출하고 언젠가 친척언니가 보내준 달고나용 국자에 집에 있던 초콜릿을 녹여서 핫초코를 만들고 크림도 거품기를 사용해 만들어주었다.
토리노의 어둠 같은 시커먼 비주얼은 사실 나오지 않지만 재료들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 확실히 에스프레소는 기계로 추출해야지 싶고 잔이 좁고 작아야지 더 낫겠다 싶다. 분명 초콜릿 시럽을 뿌린 모카치노나 아이스크림 들어간 아포가토와는 다른 맛이었는데 신기한 건 음료 자체가 꽤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곁들일만한 디저트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 사진 속의 케이크이며 레이디핑거에 크림에 모르긴 해도 엄청 달아 보이는 저 리큐어 같은 저런 것들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도 레이디 핑거를 꺼내서 얹어 먹었다.
또 다른 비체린은 콩 갈기가 너무 귀찮아서 그냥 물 양을 줄여서 드립머신에서 진한 커피를 뽑고 그냥 중탕한 우유를 펌핑하고 코코아를 타서 녹인 초콜릿을 추가하여 다소 연한 핫초콜릿을 만들었다.
초콜릿도 갈아서 얹어 보았으나 역시 커피가 생각만큼 진하지 않아서 그냥 평범한 커피 음료 같아 보였지만 달기는 확실히 달다. 비체린은 저들 모두를 섞지 않고 저 상태에서 먹어야 한다고 함. 티라미수의 뜨거운 액체 버전 같기도 하다.
그리고 비체린을 마시고 나니 어째서인지 몰레 안토넬리아나와 토리노에 대해서는 오히려 까맣게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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