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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50센트 동전 - 슬로베니아의 상징, 트리글라우 (Triglav)


 

슬로베니아 50센트 동전과 슬로바키아 2센트 동전

 

유로 동전 디자인의 몇 가지 스타일이라면,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신이 새겨진 동전, 방문해서 구경 가능한 문화유산이 들어간 동전, '영국 말고 우리나라에도 왕이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입헌 군주국의 동전, 지금보다 강성했던 역사적 부흥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나 민족의 상징을 앞세우는 동전, 그리고 국가가 끊임없이 부침을 겪는 동안에도 우직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 유산을 담은 동전.

자연 유산을 새기면 물론 그 나라의 관광 소득을 올리는데도 일조를 하겠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나라가 힘이 없어 대대로 강대국들에 휘둘렸고 민족 구성원도 종교도 다양하다. 멀쩡했던 나라가 세계 지도 속에서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할머니가 살았던 나라와 손자가 살았던 나라의 명칭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파란만장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도 늘 같은 자리에서 그들의 뿌리가 되는 어떤 자연환경이 있으니 그것을 동전에 새긴다. 특히 산이 새겨진 동전은 늘 어딘지 모르게 더 애잔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에 대한 어렴풋한 향수이자 1500킬로미터를 뻗어나가며 작은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는 백두대간에 대한 은근한 산맥부심이랄까. 
 
 

범슬라브 색상.

 
 
나란히 산을 새긴 슬로베니아와 슬로바키아의 동전을 보고 있으니 이 두 나라가 조금 궁금해진다. 세상의 삼색국기들은 참 비슷하고 특히 범슬라브 색상을 쓰는 남슬라브국가들의 국기는 뭔가 서로 구분되기 위해서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만 사실상 구별에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불가리아만 그나마 녹색이 들어가서 눈에 띄지만 뚝 떼어서 이탈리아나 헝가리 국기랑 붙여놓으면 알던 국가의 국기들도 헷갈리기 시작할듯.

슬로베니아와 슬로바키아는 '슬라브인의 땅'이란 의미의 국가명은 물론 국기도 비슷하다. 알고 보면 국경조차 접하고 있지 않은 이 나라 사람들은 두 국가를  늘 헷갈려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절묘한 구분법 몇 개는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이 남슬라브 나라들을 구분하려면 결국 이들 국가의 국장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두 나라의 국장과 국기

두 나라의 국장에 나란히 산 봉우리 세 개가 그려져 있다. 슬로베니아 국장에는 율리안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높이 2864미터의 슬로베니아 최고봉 트리글라우가 새겨져 있다. 슬로바키아 국장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뻗어 나온 타트라 산맥과 마트라, 파트라 산맥이 각각 한 봉우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이라면 트리글라우 위로 흐르고 있는 아드리아해와 슬로베니아의 강들을 상징하는 두 개의 물줄기. 왜 이들은 굳이 바다와 강까지 새긴 걸까. 
 

아드리아해에 턱걸이 한 슬로베니아


지도 속의 슬로베니아는 아드리아해에 정말 겨우겨우 접해있다. 그나마의 해안선을 확보했으므로 이미 바다 없는 내륙국 슬로바키아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21세기에도 도시의 운명은 변화무쌍해서 어떤 나라가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저런 바닷가 도시에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창조력을 발휘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만약 그런 작업이 수십 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된다면 그리고 그 물밑작업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간과한다면 국가의 운명도 정말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슬로베니아도 수세기에 걸쳐 저 바닷가 도시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을지도 모르고 같은 이유로 태어나고 자란 저 도시를 떠나야했던 민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며 관광객을 쓸어 담고 있는 크로아티아와 신발 뒷굽으로 아드리아해를 단단하게 누르고 있는 이탈리아를 생각하면 국장에 한 줄의 아드리아해를 새긴 슬로베니아의 마음을 좀 알아주고 싶다. 
 

구글 출처 - Triglav by Marko Pernhart

 
슬로베니아하면 지금까지 알프스가 지나가는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동유럽의 어디쯤, 옛 유고연방, 심지어 멜라니 트럼프의 얼굴까지 차례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나에게 트리글라우라는 은회색산이 되었다. 호수와 수목이 드리워진 풍경 틈틈이 나타나는 석회암 절벽들이 인상적이다. 수도 류블랴나에서도 64km 정도 거리니 당일 여행도 가능하다. 오래전 크라쿠프에서 경유하며 들렀던 폴란드 자코파네의 타트라 산처럼 등반 장비가 필요 없는 지점까진 기분 좋게 하이킹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리글라우 등반 영상들을 보면 뾰족하고 황량하게 길게 이어지는 돌산의 능선이 인상적인데 혹시나 해서 슬로베니아의 파리 올림픽 성적을 보니 두 개의 금메달 중 하나가 스포츠 클라이밍이다. 얀야 간브렛 Janja Garnbret 이란 선수는 올림픽 초대 챔피언이자 도쿄 올림픽에 이어 이 종목 2연패인데 출전 선수들에 비해 월등해 보이고 나이도 젊어 3연패까지도 가능 할 것 같다. 
 
 


언젠가 저녁을 먹고 카드 계산을 한 후 각자 팁으로 쓸 동전을 주섬주섬 꺼내는데 눈앞에 떡 버티고 있던 산. 유로 동전의 12개의 별들 사이사이 깨알처럼 들어찬 알파벳 슬로베니아. 트리글라우산 위로는 슬로베니아의 독립 시기를 의미하는 별자리인 게자리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게자리위에 자리 잡은 한 줄의 문장.
 
Oj Triglav moj dom. 
 

구글 출처 - Triglav

 

문장부호도 빠져있고 내가 아는 언어도 아니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 트리글라우 나의 집!'.

이 문장은 슬로베니아 신부이자 시인인 마티야 젬리치 Matija Zemljič 가 쓴 종교적 서정시의 일부였다. 누군가는 이 산을 위해 시를 지었고 그림을 그렸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금 그 산을 오르고 있을 거고 그 산을 회상하고 있을 거고 산이 새겨진 동전을 내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도. 그리고 야콥 알야즈 Jakob Aljaž라는 신부이자 작곡가이자 산악인은 트리글라브 정상에 탑을 세웠다. 

구글출처 - Aljaž stolp



가파른 석회암 절벽들에 설치된 로프를 잡고 천천히 오르면 마치 불시착한 일인용 깡통 우주선 같은 귀여운 탑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게디미나스 언덕의 탑을 도화지에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리투아니아 어린이들을 생각하니 둥근 휴지심으로 트리글라우의 탑을 만들고 있을 지모를 슬로베니아의 어린이들을 상상하게 된다. 언제든 슬로베니아에 간다면 트리글라우가 새겨진 냉장고 자석과 티셔츠는 물론 성냥갑, 초콜릿, 미네랄 워터같은 것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알야즈 타워 Aljaž stolps는 알야즈 신부가 슬로베니아 산에 대한 외국인 등반객들의 관심이 늘어나자 슬로베니아의 산을 사수하겠단 의지 하나로 트리글라우 꼭대기 토지를 매입하여 1895년에 세운 탑이다. 두세 명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고 강풍이 불면 함께 날아갈 것처럼 왜소하지만 슬로베니아의 가장 높은 곳에 홀연히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탑의 존재는 슬로베니아인이 스스로의 상징으로 여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차린 것이 없어도 차린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두고두고 생각나는 밥상처럼 이 산을 오르고 내렸던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풍경이다. 동전 속에 시를 적고 산을 새기고 별자리를 흩뿌려놓는 사람들은 세상에 바라는것도 딱히 없을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55PbZxs0A

 

 
알야즈 신부는 탑만 세운게 아니라 마티야 젬리치 신부가 쓴 시를 노래로도 만들었다. 이 노래가 여러 버전이 있다. 중창단이 부르는 것도 있고 합창단이 부르기도 하고 락그룹이 부르는 것도 같고 장엄하고 드라마틱한 영상들이 많지만. 이 노래 영상중 가장 엉뚱한듯하면서도 리얼하고 도리어 뭉클한 느낌이 드는 영상하나를 첨부하자면 이렇다. 노래 가사는 빠졌지만 이 영상에는 모든 것이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타르 연주자, 알야즈 타워에 손을 짚고 정상을 만끽하는 사람들,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국기와 국장까지. 그리고 슬로베니아 국장 속에는 또 트리글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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