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켜보니 말 한번 타보지 못한 그간의 내 인생에도 많은 말들이 있었다.
작은 숙녀 링이 타던 앤드류스, 제이크 질렌할을 브로크백마운틴까지 데려다주던 말, 와호장룡에서 장쯔이와 장첸을 태우고 광활한 벌판을 누비던 말,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크리스틴 토마스 스콧과 함께 사막을 배회하던 말, 무거운 짐을 싣고 가파른산을 오르기 전에 과음을 해야 했던 이란 영화 속의 노새들, 5살 내 동생이 설악산 입구에서 오천원주고 기념사진 찍었던 말, 그리고 슬로베니아 동전에 새겨진 합스부르크 왕조가 사랑했던 말, 리피자너.

언젠가 대형공구상점에서 연필깎는도구 하나를 사고 거슬러 받았던 이 20센트 슬로베니아 동전은 당시 그 행색이 지나치게 남루하여 나는 다시 상점으로 돌아가서 후시딘 연고처럼 생긴 금속 연마제를 구입했다. 연마제를 묻힌 면봉이 지나가는곳마다 말을 뒤덮은 털들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하고 그 탄탄한 다리 근육이 울룩불룩 위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아주 정교하게 새겨진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동전 자체는 정말 반들반들해졌다.
달리고 있는 두 마리의 말을 빙 둘러싸고 있는 슬로베니아 단어 Lipicanec. 슬로베니아 동전 위를 질주하고 있는 말은 합스부르크의 명마 리피자너이다.

이 리피자너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62년 합스부르크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가 오스트리아로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말을 데려오고 1580년 그의 동생인 카를 2세가 리피차(Lipica)에 종마 사육장을 만들면서 리피자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현재 리피차는 슬로베니아의 트리에스테 근처에 속한 지역이고 리피차의 종마 사육장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사육장으로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슬로베니아인들이 공식적으로 리피자너를 동전에 새길 수 있었던 이유이다.

리피자너는 아랍말과 스페인의 안달루시안 말, 나폴리 말 등을 교배시켜 만들어진 강인하면서도 우아한 품종이다. 어려서는 검거나 진한 회색빛이지만 6세에서 10세 사이에 털갈이를 거쳐 백마가 된다. 대략 147cm 에서 157cm 정도로 사진상으로도 사실 그렇게 크고 날렵해보이진 않는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스페인 승마 학교에서 수준 높은 고전 마술 교육을 받으면서 왕실의 공식 마필로 자라난다. 당시의 궁정 행사나 군사 퍼레이드 같은데에서 말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은 한때 합스부르크 왕조의 겨울 궁전이었다가 빈의 관광 명소가 된 호프부르그 궁전에서 공연을 한다. 오스트리아에 위치했는데 승마 학교 이름에 스페인이 들어가는 이유는 리피자너의 안달루시안 혈통때문.

기르던 애완동물에게 큰 유산을 남기는 유명인들처럼 옛날 옛적 왕이나 귀족들도 그들이 소유한 동물이나 명마들에게 유산을 남겼을까. 평생을 따라다니던 유전질환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임종 직전의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애마가 유난히 애착을 가지고 뛰어놀던 목초지 5만헥타르와 그 애마가 꿀잠을 자던 마구간 같은 것들을 유산 목록으로 열거하고 그것을 잉크를 찍어가며 받아 적는 시종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말들이 죽으면 그 말이 가지고 있던 그런 재산들이 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말들도 근친의 근친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나의 상상일뿐이지만.
합스부르크의 명마, 리피자너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란 영화 < 취한 말들의 시간> 속의 노새들이 생각난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대에 사는 쿠르드족들은 물건 값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 이라크 땅을 향한다. 산에 매복하고 있는 도적들과 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노새에 물건을 가득 싣고 눈 쌓인 산을 넘는다. 가파른 산을 넘을 때 균형을 잡기 위해서 가득 실은 짐 위에 무거운 타이어까지 처억 올린다. 그리고 그 짐의 중량과 추위를 견디게 하기 위해 긴 여행 전에 노새들에게 술을 먹인다. 때로는 너무 많은 술을 먹여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다.
노새는 순수 말의 혈통만 지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란에 사는 말이라면 엄밀히 말하면 고대 페르시아 왕조의 번영을 누린 말들의 후손들일 텐데 리피자너와는 사뭇 다른 운명이다. 오래 전 영화니깐 그 노새들의 삶도 지금은 좀 수월해졌기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운 종마 사육장에서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탄생한 이 말들은 그 교배에 있어서도 엄격했을거다.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합스부르크 왕조를 생각하니 그들이 이 명마의 유전적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대대로 말들의 사회에도 혈통 등록부라는 것이 있어서 그곳에 등록된 말들끼리만 교배를 할 수 있고 혈통 관리는 왕족 못지 않게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경주마라면 경주 성적을 토대로 빠른 속도와 강한 체력을 가진 우월한 부모 말을 신중하게 선발하여 교배하기도 하고 우수한 조상의 유전자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유전적 결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직계조상이 아닌 3~4 세대 이상 떨어진 친척들을 교배하기도 한다.
리피자너의 경우 현재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태어났던 8마리의 리피자너 종마가 기초 혈통으로 인정받고 있고 현대의 모든 리피자너들이 이 8마리의 종마로부터 뻗어나온 혈통이라고 한다. 현재 19개국에서 약 11000명의 리피자너들이 등록되어있다.

하지만 그렇게 공을 들여서 교배를 해도 우리의 리피자너를 힘들게 했던 것이 있으니 유럽의 수많은 전쟁이다. 이 리피자너 품종은 수세기에 걸쳐 전쟁을 이겨내면서 보존된 품종이다. 전쟁이 나면 대피하고 전쟁통에 출산을 하고 전쟁이 잠잠해지면 다시 리피차로 돌아와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구간을 수리하고선 얼마간 한가지게 살다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 쳐들어오면서 또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고 세계대전을 겪고 그렇게 유럽 사람들과 함께 모진 피난의 역사를 겪어낸 사연 많은 리피자너.
하지만 전쟁광 나폴레옹은 유배당하고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는 암살당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결국 몰락했지만 리피자너는 살아남아 슬로베니아 동전에도 새겨졌으니 어찌 보면 성공한 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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