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목록에 추가할 수 있는 오리지널한 애니메이션을 얼마전에 보았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의 현란한 상상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귀엽고 웅장하다 생각해서 보는 순간엔 혹하지만 지나고 나면 캐릭터만 남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봐도 좋아지지 않는 영화가 팀 버튼의 영화들이다. 그 둘은 기술적으로 너무 확고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져버려서 팀 버튼스럽지 않고 지브리스럽지 않은 창작은 절대로 할 수 없을것 같은 느낌을 준다. 판타지가 판타지를 위한 판타지가 될때 스토리는 묻혀버린다. 이미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겉모습을 따라가려 발버둥치다보면 껍데기만 남는다. 물론 관객은 그들이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들고 나오면 변해버렸다고 외면할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딜레마이다. 이 만화영화는 충분히 화려한 색상과 판타지가 섞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정적이고 시적이다. 마음놓고 반해도 될것같은 가슴속에 남는 깊이있는 이야기이다. 역시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스토리이다. 거기에 영상과 음악이 더해질때 힘을 얻는것.
최근에 본 두편의 작품 <대니쉬 걸>과 <늑대 아이> 는 우연히도 닮아 있었다. <대니쉬 걸>의 게르다는 뒤늦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여자가 되려는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남편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길을 택한다. 이 만화 영화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한 인간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자할때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인의 삶을 가만히 관조하고 방임하는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의 지지자가 될 수 있지만 가끔은 불필요한 방해와 제재를 가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것은 한편으로는 나 자신도 그저 나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것과 다르지 않지만 시대적 배경에 적합하지 않을때 사회적 가치에 위배될때 개개인의 정체성은 말살당하기도 한다. <대니쉬 걸>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의 코펜하겐이다. 성전환 수술을 문의하러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지만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출동한 경찰을 피해 도망쳐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작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이미테이션 게임>속의 실존 인물 앨런 튜링 역시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가 이룬 업적과는 상관없이 동성애자였단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고 자살을 택한다.
<늑대 아이>에서 대학생 하나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아예 사람이 아닌 늑대 인간이다. 늑대는 앞서 언급한 영화속의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들처럼 사회적 소수자를 상징하는 소재이다. 그들이 이미 깊은 사랑에 빠졌을때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놀라지만 일부러 만남을 피하고 그리움에 고통받는 드라마는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이 늑대라는 사실을 어떤식으로 밝혀야할지 충분히 고민했을 남자에게 하나는 울음석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도 너는 너잖아'.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사실일 뿐 그녀가 사랑에 빠진 남자와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늑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하나는 늑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순조롭게 살아가는듯 보이던 그들의 삶에 불행이 닥친다. 세 가족을 남겨두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것. 하나는 아파서 우는 아이를 등에 엎고 가슴에 안고 한밤중에 뛰어 다닌다. 당장 소아과에 가야할지 동물병원에 가야할지부터 문제이다.
평범한 사람도 아이 둘을 혼자의 힘으로 키우는것이 힘이 들진데 그녀는 사람의 육아 방식만으로도 동물을 키우는 방식만으로도 아기들을 키울 수 없음에 어려움을 겪는다. 절반은 늑대로서의 삶을 살아온 남편의 빈자리는 크게만 느껴진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좁은 도시에서의 삶은 배로 어려워진다.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늑대로 바뀌는 감각을 조절하는데 미숙하다. 방안에서 네발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때가 되어도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 아이들도 국가의 관리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하나는 도시 생활을 접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시골 생활을 택한다. 단순히 전원 생활을 꿈꾸는 도시인이 아니라 절반은 동물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키우는데에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녀는 외딴 시골 산자락에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집을 구입한다. 손볼곳도 많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있지만 아이들을 키우기에 더 적합한 장소는 없을것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자급자족을 시작하지만 번번히 실패하는 농사에 마을의 노인들에게서 농사 기술도 전수받고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마을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두 아이를 키우는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움을 주려 노력한다. 꽃이라는 뜻의 그녀의 이름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웃기를 바라며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녀는 시골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웃는 얼굴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 건강하게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것만으로도 그녀는 큰 힘을 얻는다.
시골은 아이들에게는 낙원이다. 원한다면 늑대의 모습으로 원없이 뛰어다니며 놀 수 있다. 엄마인 하나 역시도 시골 생활에 문제없이 적응해간다. 아이들은 자라난다. 말괄량이 딸 유키는 학교에 입학한다. 남동생 아메는 튼튼하고 밝은 누나에 비해 어딘가 구석지고 약해보인다. 아직 미숙한 몸짓에 물에 빠져서 죽을 고비도 넘기지만 그들은 그렇게 사회속에서도 자연속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 하나는 생각치못했던 문제들에 직면한다. 커가는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시작한것. 학교에 다니는 유키는 늑대의 정체성을 지닌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완벽하게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위축된다. 유키의 반으로 전학 온 쇼헤이는 반 아이들의 관심의 중심에 있지만 엄마의 재혼으로 혼자가 되어 내적 혼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 쇼헤이는 유키에게서 다른 여자아이들에게서와는 다른 느낌을 받고 그런 쇼헤이의 관심을 늑대임이 발각된것이 아닐까 생각해 전전긍긍하는 유키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자제력을 잃고 늑대로 변해 같은 반 그를 공격하는 실수를 범한다. 쇼헤이는 부상을 입고 유키는 학교에 가지 않게 되지만 결국 나중에 유키가 자신의 모습을 속시원히 드러내고 마음을 여는 상대도 쇼헤이이다. 이 만화를 보고나서 찾아 본 호소다 마모루의 전작 <썸머 워즈> 에는 90세 할머니의 생일을 맞아 모인 대가족이 나온다. 커다란 상을 빙 둘러싸고 옹기종기 앉아있는 장성한 자식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린 아이들. 어린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 임신한 엄마 옆을 지키고 있는 남자 아이, 누나와 형과 티격태격하며 노는 어린 아이. 그리고 바깥에서 생긴 아웃사이더 같은 자식도 품에 안는 할머니. 감독은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뚜렷한 로망이 있는걸까. 아빠와 남편의 부재속에서 하나와 유키와 아메가 살아가는 커다란 시골집은 세상 사람들과 마음놓고 섞일 수 없는 그들의 고독함을 극대화하지만 비슷한 생김새의 썸머워즈속의 대궐같은 시골집에 꽉꽉 들어차서 북적거리는 대가족은 90세 할머니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사회적 혼란을 이겨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가정에서 나온다는것을 역설한다.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재혼을 겪는 쇼헤이의 방황 역시 같은 맥락으로 그려진다.
늑대로써의 자신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것을 깨닫는 아메는 인간 사회에서의 삶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다. 인간으로써의 삶에만 더 큰 미련이 있는 누나 유키와는 정반대이다. 아메는 유키의 행동에 냉소적이다. 늑대로써 야생의 삶을 선택하려는 아메는 하나에게는 큰 슬픔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선택한 삶속에 아이들을 가둬둘 수 만은 없는 때가 온것이다. 아메를 설득하려 애쓰던 하나는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아메를 놓아 준다. 그녀는 늑대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의 삶을 선택했던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없었을것이다. 그 선택으로부터 생겨나서 이제 막 삶의 주체가 되려는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그녀였기에.
감독의 2015년작 <괴물의 아이>도 꼭 보고 싶다. <늑대 아이> 만큼 슬픈 내용이 아니길 바란다. 장면 장면에 코믹한 요소가 가득하지만 내가 본 그 어떤 만화나 영화보다 섬세했고 사실적이었던 심리 묘사. 사랑에 빠지는 하나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죽은 아빠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신의 본질을 찾으려 애쓰는 아메의 모습은 가슴 뭉클했다. 남편을 닮은 아들이었기에 하나의 마음은 더 아팠을거다. 내 아이는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내가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더라도 말없이 지켜봐주었던 나의 부모님처럼 나도 내 아이의 선택을 무던히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입장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모두에게도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작품같다. 잔잔한 울림이라는것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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