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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뉘른베르크 (2025)



 
 
독일 독수리(https://ashland.tistory.com/559076) 하면 사실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가 생각나고 루프트바페 하면 창설자이자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무시무시한 일을 벌인 전범에 불과하고 사형을 선고받고 자살하지만 이 약쟁이 사령관 자체는 솔직히 말해서 재밌다고 말하면 안 되지만 재밌는 게 사실이다. 나치 전범들은 세상에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과정들을 기록해 놓은 많은 글들 속에서의 그들은 출근해서 자기들끼리 꽁냥꽁냥 열내며 일하다가 퇴근하고 다음날 또 출근해서는 어제 하던 나쁜 짓을 이어서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집단에 소속되어 어떤 신념에 완전히 종속당했을 때 그 정당성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나쁜 짓의 수위는 어디까지일까. 나는 과연 악의 평범성은 나에겐 전혀 해당사항이 될 수 없을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그건 뭐 어떤 전쟁 서적을 읽어도 어떤 독재자의 이야기를 읽어도 맞닥뜨리는 질문이다. 그래서 어쨌든 제3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에 관한 영화들은 보통은 볼만하니깐 이 영화도 그렇겠지 하면서 봤었다.    
 
<뉘른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열린 나치 전범 재판이 배경이다.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고 이미 오래전에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아마 언젠가 또 만들어질거다. 패전한 제3제국의 지도자들과 그들을 심문하는 연합국 인물들 사이의 긴장과 심리전을 중심으로 전개될거라고 기대했지만 사실 살짝 부족했다. 영화 내내 재판 장면만 나왔어도 사실 충분했을거다. 영화는 전쟁이 끝난 직후, 헤르만 괴링(러셀 크로우)이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치 권력의 핵심 인물들이 국제 법정에 서게 되는 모습을 따라간다. 재판정은 단순한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패배한 체제의 논리와 승리한 체제의 정의가 맞부딪히는 공간이다. 피고들은 자신의 행위를 국가와 명령, 혹은 시대적 필연으로 정당화하려 하고, 검사와 심문관들은 그럼에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보고 개인의 책임을 입증하려 애쓴다. 
 
전범 재판은 1945년부터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 연합국은 나치 지도부를 단순히 처형하는 대신 공개 재판에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는 국제법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실험이었으며, 국가의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개인의 범죄 책임을 면제할 수 있는지 여부를 세계 최초로 본격적으로 다룬 사건이었다. 재판에는 연합국이 참여했고 군사 지도자·정치가·외교관·선전 책임자 등 나치 체제를 움직인 핵심 인물들이 피고석에 앉았다. 또한 이 재판은 법률적 절차뿐 아니라 심리학적 분석의 장이기도 했다. 전담 심리학자들이 피고들을 면담하며 그들의 성격과 사고 구조를 연구했다. 그런데 그런 점은 사실 흥미진진하게 다뤄지진 않는다.  악이 개인의 광기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권력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정상적인 선택에 불과할 뿐인지를 파헤치기보다는 오히려 헤르만 괴링과 심리학자의 교감을 보여주려했던 느낌도 살짝 든다.
 
사실 이 소재는 이미 여러번 다뤄졌고 새로울 게 없다. 뉘른베르크 재판뿐만 아니라 제3제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다룰 영화라면 그 나치 핵심 인사들을 누가 연기하면 잘 어울릴지는 간혹 생각하곤 했다. 브래들리 쿠퍼나 매즈 미켈슨이 살을 찌우면 헤르만 괴링과 꽤 비슷할 것 같고 톰 히들스턴은 괴벨스 역에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정에 서는 순간을 위해서 러셀 크로우는 좀 살을 뺐어야 하는 게 맞다. 약쟁이 헤르만 괴링은 법정에선 꽤나 핼쑥했기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단순히 패전국의 지도자들을 처벌하는 절차가 아니라, 근대 이후 처음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를 개인의 책임으로 물은 역사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종종 이 복잡성을 단순화한다. 많은 2차 세계 대전 관련 작품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전면에 내세운다. 물론 그것은 나치 범죄의 핵심이며 결코 축소될 수 없는 비극이다. 하지만 그 결과만을 강조할 때, 그 범죄를 가능하게 만든 인간들의 심리와 권력 구조는 종종 밀려난다. 학살의 이미지가 모든 것을 압도하면서, 그 학살을 명령하고 정당화하고 실행했던 인간들의 내면은 충분히 탐구되지 않는다.
 
헤르만 괴링은 법정에서조차 권력자의 태도를 유지하며 검사와 논쟁을 벌였고, 자신의 행동을 전략적 선택으로 설명하려 했다. 리벤트로프는 외교관이라는 역할 뒤에 숨으려 했으며, 국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논리를 반복했다. 이들은 모두 광기 어린 괴물이라기보다, 체제 속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했다고 스스로 믿었던 인간들이었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도 큰 갈등이있었고 누군가는 마음에 안 드는 동료였으며 항상 의견 일치를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요소도 딱히 부각되지 않는다. 리벤트로프는 사실 대사조차 없었다. 헤르만 괴링에 몰빵한 영화인데 헤르만 괴링도 딱히 안보인다. 

실제 재판 자체는 승전국 내부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미국은 법과 절차를 통해 새로운 국제 질서를 세우려 했고, 소련은 이미 유죄가 확정된 적들을 정치적으로 단죄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영국은 현실주의적 계산 속에서 재판의 형식과 처벌의 실효성을 저울질했다. 정의와 복수, 법치와 선전, 이상과 현실이 한 공간에서 충돌한 셈이다. 당연히 이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까진 다뤄지지 않는다. 특히나 러시아의 입장은 또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라미말렉이 연기한 전범들의 전담 심리학자와 전범들의 피튀기는 신경전이 보이려나 기대했지만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권력자·관료·군인의 서로 다른 내면을 해부하고, 동시에 미국·영국·소련 검사단 사이의 정치적 긴장을 교차 편집하는 구조였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지, 그리고 국가와 개인 사이의 책임이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집요하게 탐색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어쩌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잘 알지 못하는 오래전 역사이기 때문에 전쟁 종료 후 연합군이 발견하는 수용소 실태를 찍은 증거 화면들을 나열하는 것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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