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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The Passengers of the Night (2022)

  

 
 
엘리자벳(샤를롯 갱스부르)은 청소년기 딸과 아들을 혼자서 키우는 이혼한 중년 여성이다. 긴 세월 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이렇다 할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던 엘리자벳은 이혼 후 돌연 가장이 되면서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직 이혼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데서 오는 절망감이다. 그러다 이력서에 '감수성 풍부' 한 줄을 적어 넣은 엘리자벳은 야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화 교환원 일을 시작한다. 라디오 방송에 전화를 걸어오는 청취자들을  진행자에게 연결해 주는 일은 꽤나 드라마틱하게 그녀를 다시 세상과 연결해 준다. 
 
엘리자벳은 센강과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산다. 커다란 통창이 있고 적절한 컬러가 섞인 가구와 패브릭, 그림들이 걸려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전남편은 집을 나가 여자친구와 살고 있고 아이들 양육을 엘리자벳이 맡았으니 아마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나면 이 집을 팔고 재산을 분할할 거다. 그 자신의 모든 청춘이 깃든 장소이지만 온전히 공유할 사람이 없고 언젠가 떠나야 할 공간이라는 것, 이곳에서 모두가 함께인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사실에 아파트 창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표정은 공허하다. 
 
 

 
 
엘리자벳은 라디오에 출연했던 갈곳없는 소녀 탈룰라(노에이 아비타)를 집에 데려온다. 탈룰라는 그렇게 엘리자벳의 삶 속에 들어온다. 엘리자벳의 아들 마티아스에게는 첫 경험의 상대가 되고 엘리자벳에게는 다시 엄마처럼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엘리자벳은 탈룰라에게 모성본능을 느끼는 동시에 버림받았을지 모를 그녀를 보듬으며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치유되고 싶다는 욕망을 해소한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외양의 탈룰라지만 이 가족 사이에서 갈등을 만들거나 극적 전환을 일으키진 않는다. 구경꾼처럼 머물다가 말도 없이 사라지고 약물중독 상태에서 다시 등장했다가 또 미련 없이 사라진다. 엘리자벳과 아이들은 타자와 가족 그 중간쯤의 자세로 자연스레 탈룰라를 대한다. 탈룰라는 그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고 엘리자벳과 아이들 역시 탈룰라가 홀연히 떠난 빈자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탈룰라는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다음역이면 소리 없이 내려버리는 승객처럼 엘리자벳의 삶을 들락거린다. 우리는 뒷좌석의 기다란 창문밖으로 점점 작아지는 타인을 놓아주며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갈 뿐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앞으로 뭘 할 것인지에 대해 속속들이 털어놓기에 그 정거장 사이의 거리는 턱없이 짧다. 
 
엘리자벳이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한밤중의 파리를 걸어 돌아오던 날, 영화 시작부터 늘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그녀가 미소짓는 순간은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한밤중에 라디오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세상과 연결된다. 그러나 통화가 끝나면 다시 혼자가 되어 혼자만의 잠 못 드는 밤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아마 그걸 알면서도 잠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그 짧은 순간이 좋아서 다시 라디오 앞으로 돌아온다. 짧은 시간 라디오 진행자에게 쏟아냈던 이야기들은 그 자신을 이루는 파편에 불과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결국 상대의 일부를 통해 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치 이해받는다고 생각하고 상대에게 의지하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스쳐 지나간다는 의미에선 모두가 동등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이며 내리려는 역이 저마다 다른 승객일 뿐이다. 간혹 함께 내리자고 붙잡고 싶은 순간이 생기고 종착역까지 함께 갈 수 있기를 열망하지만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각자의 삶은 하나의 여행이고 모두가 다른 여정을 가진 여행자이며 간혹 우연히 마음을 나누고 한동안은 함께 머물지만 결국 스쳐 지나감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영화는 81년 5월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는 순간부터 87년까지의 파리가 배경이다. 그 6년이란 시간동안 엘리자벳은 이혼의 아픔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십 대 아들은 여전히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청년으로 성장하여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1981년이라는 자막이 떴을때 그 시절을 살았던 프랑스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향수를 느낄까 궁금했다. 등장인물들의 스타일은 요즘 80.90년대 스타일이 워낙 유행해서 큰 차이는 없었다. 특히 샤를롯 갱스부르처럼 거의 일관적으로 유행을 안타는 배우는 늘어난 터틀넥을 입어도 긴 목이 돋보일 뿐이었으며 어떤 옷을 입어도 그냥 핀터레스트에 나올법한 평상시 모습 같아서 80년대가 어땠을거라 느끼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프랑스인으로써의 그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는 느껴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 이들이 달릴 땐 쥴과 짐을 보는 것 같고 이들이 다리 위에 앉아있을 땐 미셸과 알렉스가 보인다. 크림 브륄레를 먹을 땐 조 다신의 노래를 들어야 한다는 국률,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줄담배를 피우며 열을 올려 대화하고 한밤중에 라디오 부스에 앉아 아마도 코냑에 담배를 피우며 청취자의 전화를 받는 중년의 엠마누엘 베아르는 왜 그렇게 설득력 있는지. 
 

영화는 거창한 사건을 보여줄 듯하다가 끝내 보여주지 않고,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깊이 파고들기보다 치고 빠지듯 흘러가다 끝난다.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연출의 한계처럼 느껴지다가도, 어쩌면 그것이 관계에 깊게 얽매이지 않으려는 이들의 성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놓아줄 땐 놓아주고, 붙잡혀도 뿌리칠 수 있는 자유. 그들은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지만 그 감정의 지속력에 얽매이지 않는다. 무엇이 진심이었는지를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고, 서로의 의도를 의심하지도, 의심받지도 않겠다는 태도를 지닌다. 그들에게 관계란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향을 인정하면서 잠시 같은 장면을 공유하는 상태일뿐이다.
 
영화에서 엘리자벳이 점점 웃음을 되찾고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영화의 엔딩측면에선 어쨌든 기분 좋은 결말이지만 결국은 늘 혼자 남던 라디오 진행자 반다(엠마누엘 베아르)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자신이 아마 알코올의존증이 있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정작 자신은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반다가 주변 인물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경쟁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야간 라디오 방송은 인정받기 힘들지만 신경 안 쓴다는 그녀의 말이 결국 혼자 감당하고 견디는 삶에 대한 긍정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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