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ydos_2003
와인 한 병이 눈에 들어와서 사왔다. 기내에서 줄 법한 200ml 도 채 안되는 작은 칠레산 와인이었는데. 무슨 은행 금고의 채권도 아닌것이 떠들썩한 보통의 마트 한켠에 생뚱맞은 작은 와인 냉장고 속에 곤히 놓여있는것이다. 와인병의 에티켓에 120이라는 숫자가 크게 적혀있었다. '120명의 영웅을 기리며' 라는 문구와 함께. (검색해보니 이 와인은 산타 리타라는 칠레의 도시 어느 농장에서 은신중이었던 120명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것이라고 한다. 스페인 지배하의 칠레 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을 농장주가 스페인 군대에 농장이 다 불탈것을 감수하고 숨겨준것이라고.) 근데 난 이 글을 쓰기 직전 다시 와인병 에티켓 문구를 확인할때까지 영웅을 왜인지 신으로 인식했다. 120의 신을 기리는 와인...뭔가 더 신비하고 그럴싸 해보였기에 보자마자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해버린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던것은 다름 아닌 이집트 아비도스 의 신전에서 새어나오던 빛이었다. 그런데 120 뒤에 무슨 수사를 써야할지 애매하다. 신은 어떻게 세지. 켤레도 아니고. 명도 아니고 분도 아니고. 그래. 줄기라고 하자. 투명하게 새어들어오던 빛의 줄기. 공기중에 부유하는 모든 영혼들을 깡그리 집어 삼키고 있던 그 빛. 요즈음 오래된 이집트 여행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난 유독 저 빛을 사랑한다. 마치 신전 방문을 사전 예약이라도 한것처럼 삼엄한 경비에 둘러싸여 최소의 인원만이 당도했던 아비도스의 신전. 아비도스는 저승으로 가기 직전 심장의 무게를 달아본다는 신 아누비스와도 발음이 비슷하지 않은가. 그 이름을 볼때마다 묵직하고 경건했던 그 아우라가 느껴지는것이다. 그 여행내내 나의 마음은 불안했다. 곁눈질하면 집이 무너져서 홍수에 둥둥 떠내려가는게 보이는데도 제 성질을 이겨내지 못해서 결국 어떤 감정들은 무너지고 금이 갔다. 이집트에 다시 간다면 내가 가장 이르고 싶은 곳은 저 빛이다. 가장 짧게 머물렀던곳의 가장 뜻밖의 공명. 압도됐던곳. 하지만 신전을 나오자마자 다시 부서지는 감정의 노예가 되었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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