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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Le Havre (2011)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은 가끔 이렇게 의외의 일러스트를 타이틀 커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체제작한 커버들이 대부분 개성있고 인상적이지만 이렇게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귀엽기까지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전부를 갖고 싶다. 소품 같은 영화, 마치 일요일 오후 2시경의 EBS 세계의 영화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어 이 영화 심상치 않은데 하면서 부랴부랴 공비디오(라니 어느 시절 이야기인가)를 집어 넣고 녹화 버튼을 누르게 했던 영화들처럼, 다소 무거운 주제들도 무덤덤한 유머로 살짝 스치고 건드리며 가볍게 풀어내는 감독 특유의 재주, 사연이 많은 주인공들이지만 스스로를 향한 연민으로부터 자유롭고 관객에게도 그런 인물들을 향한 편파적이고 인위적인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새 가슴 깊이 아련한 마음을 품고 바라보게 되는 주인공들.  하지만 어둡고 절제된 화면속의 인물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그의 영화 특유의 유쾌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것은 한편으로는 특권이고 쾌감이다. 아주 사소한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할 때 그리고 그 불평과 요구가 충분히 타당하고 설득력있을때 그 아우성들을 감내하고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제3자에게는 오히려 미묘한 권력처럼 휘둘러질 수 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사회적 약자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그 보장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우리 괜찮다고 억지로 웃지도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평범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을 불행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컨테이너 박스 앞에 쪼그리고 앉은 겁에 질린 아프리카 소년의 흰자위는 그림의 절반을 채운 옅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울듯 압도적이고도 강렬한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일단 그 눈빛을 가까스로 벗어나면 바닷가 도시의 맑고 나른하고 따사로운 오후의 느낌이 스르륵 밀려온다.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와 그들 모두를 주시하는 형사 사이의 거리감은 미묘하다. 그들은 흡사 팽팽하게 대치중이만 형사는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남자는 오히려 여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의 아내와 가족을 찾고 싶어하는 아프리카 소년을 생각하면 사실 그의 마음은 복잡할것이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그의 표면적인 여유가 오히려 내 마음을 급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늘 그랫듯이. 인물들을 향한 나의 수동적인 동정이 어설프게 내민 손만큼 궁색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 조차도 그들에겐 삶이다. 결국 누구도 쉽게 구제해줄 수 없기에 오히려 씩씩하고 단단한 눈빛을 가진 이들. 

역전에서 구두닦이 일을 하는 남자는 아내와 함께 아주 단촐한 삶을 산다. 어느날 다수의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들이 선박의 컨테이너에서 발견되고 그들 중 소년 한명은 탈출을 해서 우연히 구두닦이 남자의 집에 은신하게 된다. 그들을 태운 배는 영국으로 갔어야 했다. 그는 소년의 가족이 있는 영국으로 소년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구두닦이일로 꼬깃꼬깃 모아둔 돈에다가 지인들과 합심해서 동네 술집에서 콘서트를 열어서 번 돈을 합쳐 기차표를 마련한다.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형사가 있지만 다행히 악랄하지 않다. 마지막 순간 배의 창고로 숨어든 소년을 확인하지만 그는 모른척 보내준다. 장소 섭외를 잘한것인지 특유의 색감때문인지 2011년에 촬영된 영화라고 하기에는 훨씬 오래 전 영화처럼 보인다. 익히 알려진 핀란드 여배우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는지 핀란드 어디쯤이겠지 생각했지만 의외로 프랑스 항구도시 르아브르가 배경이다 . 옷을 아무리 바꿔입고 아무리 멀리서 걸어와도 걸음걸이만으로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것처럼 배경이 어디든 감독이 결코 자기 스타일을 떨쳐버릴 수 없는것인지 감독의 이전 영화들 특유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 그래도 여기 프랑스 맞는가보다 하고 납득시키는것은 어느장면에서나 등장하는 라벨없는 와인병. 오며가며 머리에 부딪쳐서 휘둘리는 전구가 매달려있는 취조실처럼 침침하고 벽마감도 단순하기 이를데없는 조촐한 그들의 부엌 테이블에 놓인 와인 한 병이 저녁 밥상에 이따금 올라오던 소주 반 병과 아빠의 소주잔을 떠올리게 한다. 

부엌에 있는 밥상을 들고 나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에게는 작은 자기 집 마당에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일상이 있다. 그래 어쩌면 그 집이 다달이 월세를 내야하는 남의 집일 수도 있고 오늘도 신발닦이 벌이가 안좋아서 바게뜨를 슬쩍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누구도 침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오늘의 와인을 마신다. 그의 머릿속은 프랑스어를 잘하지만 굳이 영국으로 가려했던 아프리카 소년을 도울 생각으로 꽉차있다. 그의 가족이 굳이 영국으로 간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민자들의 삶이 어디든 쉽겠냐마는 프랑스가 유독 그런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암전이 되고 나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텝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 그들이 공들여 만든 무대 위에 노장 배우가 서있다. 혹은 마치 극사실주의 화가가 그린 너무나 실제 같은 그림처럼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으로 그림 같은 장면이다. 멋진 연예인들 사진을 보고 어떻게 찍어도 화보 같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탁월한 조명과 촬영이라 어떤 장면에서 멈춤버튼을 눌러도 보도자료 같다. 이들의 숨길것없이 단순한 삶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동작과 동작 사이를 채운 것은 오히려 침묵이고 여백이다. 그들의 삶에 많은 것이 필요없듯 그 삶을 표현해내는데에도 역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좋은 각본, 훌륭한 연기, 배경 음악 전부가 중요하겠지만 결국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가장 오래도록 남는 이런 잔상들을 생각하면 결국은 영화라면 영상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화면을 채운 균형있는 구도와 음영. 정말 미술관에 걸려있을법한 그림 아닌가?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병 속의 꽃 한 송이는 흡사 정물화의 일부같지만 시름에 잠긴 경직된 아프리카 소년에게서는 호흡을 통한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는듯하고 옆에 앉아 있는 개는 금방이라도 밖에서 돌아오는 남자의 소리를 듣고 튀어나갈듯 동적이다. 

해마가 어떤 생물체인지도 잘 모르면서 난 내가 해마를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입구에 해마가 그려진 이 바도 마음에 들었다. 르아브르라는 도시에 갈 일이 있을까 싶지만 어쨋든 이 도시는 르코르뷔지에의 스승(이라기보다는 건축 사무소 고용주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이라고 할 수 있는 오귀스트 페레가 주축이 되어서 전쟁 후에 재건한 도시이다. 찬디가르에 입성해서 도시를 가로 세로로 자로 잰듯 재단하고 엄격한 콘크리트 건물을 채워넣어 인도의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도시를 만들어낸 르코르뷔지에처럼 오귀스트 페레도 프랑스 도시와 좀 다른 분위기의 도시를 만들어냈으니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다면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보다는 어쩌면 남자가 살던 동네의 얕은 지붕의 오래 된 작은 집들이 보고싶어질 것 같다. 

 파란 벽에 드리워진 꽃의 그림자만으로도 한 송이 꽃이 덜 외로워 보인다. 누군가가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은, 완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상대를 가진다는 것의 따사로움이 오히려 화면속의 절제된 색채와 움직임으로 극대화된다. 살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아내는 놀랍게도 완쾌되고 아프리카 소년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남자의 일상은 전과 같은 모습으로 흘러갈거다. 꽃 한 송이와 와인 한 잔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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