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원한 휴가

(910)
암스테르담의 어떤 부엌 암스테르담에서 뜻하지 않게 많은 이들의 부엌을 훔쳐 보았다. 자전거가 빼곡하게 들어찬 거리에 어둠이 깔리면 많은 집들이 부엌에 은은한 조명을 켜둔 채 지나는 이들의 관음욕을 충족시키려 애썼다. 보통은 반지하거나 1층집이었다. 내가 빌니우스에서 도착해서 살기 시작한 집의 부엌은 오랜동안 누군가의 암실로 쓰여졌던지라 화학용품과 사진 자료들로 가득차 있어서 도착해서 거의 1년이 넘도록 복도에 놓인 작은 인덕션에서 음식을 해먹었다. 그런데 오븐도 부엌도 없던 시절에 이 가게에서 빨간색 르쿠르제 코코떼와 모카포트와 미니 거품기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코코떼는 처음부터 변함없이 그저 소금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제는 아담한 부엌의 가스불 위에서 모카포트로 커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덕션 위에서 ..
Russia 09_3시 25분 어떤 여행은 누군가를 추억하게 하고 누군가는 또 어떤 여행을 추억하게 한다. 아직은 그래도 많은 것이 여전하여 그 추억이 덜 먹먹하고 더 수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잊혀지고 사라질 모든 타자와 함께 나 조차도 포함해서 미리 아낌없이 추억하는 것이다.
Russia 08_회색 광장 나는 가장 이상적인 회색을 붉은 광장에서 뒷걸음질치며 모스크바의 한 귀퉁이에서 만났다. 3월의 모스크바는 세상의 모든 회색이 숨어든 공간이었다. 아니 그들은 너무나 당당히 점거했다. 오색의 바실리 성당도 크렘린도 민낯이 되었다. 뭘 봐야 좋을지 몰랐던 나에게 회색의 모스크바는 한없는 소속감을 주었다. 저 구름은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아주 잠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을때조차 회색은 그를 품어주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어 70_누구 그리고 무엇 Kas Kas 는 누구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 의문대명사이다. 리투아니아어와 문법적으로 유사한 러시아어에선 이 두 단어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재밌는일이다. 전깃줄에 걸린 신발을 보자마자 튀어나오는 많은 질문들의 시작이 그랬다. 저게 뭐야. 누가 던졌을까. 누가 저기 올라갈 수 있을까까까. Kas, Kas, Kas, 줄 위를 걷다가 벗어놓고 온 신발이면 좋겠다라는 바램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리투아니아어 69_빛 Šviesa 오래되고 새로운 것, 초라하고 멋진 것을 상관하지 않으며 힘들이지 않고 뚫고 들어오는 것. 빛은 단 한순간도 낡은 적이 없다.
Midsommar (2019) 첫 해 리투아니아를 여행했을 때 얼떨결에 경험했던 하지 축제의 강렬함을 기억한다. 북구의 백야까지는 아니었지만 10시가 넘어도 대낮 같은 세상은 생경했고 아름다웠다. 들판의 야생꽃들을 꺾어서 화관을 만들고 하루 온종일 그것을 쓰고 다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스름해지면 작은 초를 켜서 화관 한가운데에 놓고 강에서 흘려보낸다. 어느 해의 하지 축제때는 장작을 높게 쌓아서 태우며 돌림노래 같은 전통 민요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하듯 불 주위를 도는 행렬 속에 있었다. 불은 점점 거세지고 아래에 놓인 장작들은 점점 힘을 잃고 스러진다.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긴 시간을 지상에 남아준 태양과의 작별인사와도 같았다. 강을 따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 순 없었지만 가슴이 ..
독일 유로 기념주화 -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 3년간 세상을 떠돌다 작년에 나에게로 굴러들어 온 독일의 2유로 동전. 빌니우스에서 독일 동전을 의외로 자주 보는데 그들과 사뭇 다른 이것은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이 새겨진 독일의 기념주화이다. 그러니 이것이 나에게 온 것은 아주 흔치 않은 여정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여름 현금만 받는 딸기 천막에서 몇 번을 쓸뻔하다가 딸기를 포기하며 간신히 간직했다. 이 동전이 속세에서의 여행을 마치려면 계속 쓰지 않고 나와 함께 재가 되는 것이 맞지만 난 언젠가 다시 드레스덴에 가서 이 동전을 쓸 즐거운 계획을 세웠다. 아니면 엘베강에 방생을 하고 와야 할까? 드레스덴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부인 안나와 함께 수년간 머물면서 아이를 낳고 소설 악령을 탄생시킨 도시이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도중 빌니우스에도 머물렀으니 15..
리투아니아어 68_고슴도치 Ežiukai 같은 밀가루 덩어리에서 나왔는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니 진시황의 병마용을 떠올리게 하는 자태인가? 하긴 눈을 감고도 매번 1 그램의 오차도 없는 쌀밥을 집어 오물조물하는 스시 장인의 초밥도 어디 모두 같은 모습이겠냐마는. 그리고는 이들 밀가루 음식의 이름대로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 말을 최종적으로 되새겼다. 가장 평범한 밀가루 반죽을 가장 평범하게 떼어내어 치즈 강판의 뒷면에 쑥 밀면 탄생하는 리투아니아의 가장 평범한 밀가루 음식. 그리고 이렇게 평범한 음식인데 각 가정마다 다른 레시피가 존재 한다는 것이 이들 평범함들이 지닌 비범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