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빌니우스 카페

(35)
동네카페의 셈라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어서 통계적으로 가장 자주 가는 동네 로스터리 카페. 2년 전에 중국 대사관 옆의 허름했던 건물이 재단장을 하더니 스타트업이 들어섰고 카페도 동시에 문을 열었다. 카페가 정상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물론 최근 1년 사이다. 작년에 생긴 공유 오피스가 카페 내부에서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간혹 가볍게 입고 노트북만 들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 대학 동기가 살던 대형 고시원의 휴게실이 떠오른다. 대형 고시원들이 다 그랬던 건지 전기밥솥에 담긴 쌀밥이 기본 옵션이었는데 한동안 친구 준다고 반찬 가져다 놓고 거기서 친구랑 밥을 많이 먹었었다. 이 카페에 아침 일찍 가면 빵을 공급하는 조그만 배달차량이 도착하는데 그 차량이 떠나고 나면 정말 단 시나몬바브카나 라즈베리잼이 들어있는 ..
겨울을 사랑한다면 3월에도.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얘기를 할 것인지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심지어 소곤 될 것인지 혹은 박장대소할 것인지에 따라서도 가고 싶은 카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옷장의 검은 옷들이 저마다의 검음으로 망설임을 유발하고 기름 종이 한 장 차이의 구름의 채도가 고만고만한 비옷들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하듯 빌니우스의 몇 안 되는 카페들도 나에겐 그렇다. 극장 앞에 위치한 이 카페는 왜인지 겨울에만 집중적으로 가게 된다. 보통의 카페의 창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상현달처럼 보여주지만 이곳의 넓은 통유리창은 구시가를 향해 미세한 가속도가 붙어 하강하는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을 제법 완전하게 보여준다. 케이블을 붙들고 언덕을 오르는 트롤리버스의 꽁무니를 따라가다보면 소실점에 걸쳐있는 어린 로맹 가리의..
에스프레소와 스푸르기떼 트롤리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다 보면 구시가를 한 꺼풀 감싸며 돌다가 외곽으로 빠지기 전의 트롤리버스들이 정류하는 곳마다 거의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적당히 위장을 채우고 집을 나선 나에게 이 카페들이 너의 나른한 위장을 우리집 카페인으로 깨워주겠다며 트롤리버스 창문 너머로 손짓하는데 나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두 정거장 정도 타고 가다 내려서 잠깐 앉아서 커피로 속을 헹구고 다시 남은 다섯 정거장을 타고 가던 길을 가곤 한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우즈가베네스 축제도 지났는데 날씨가 더 추워졌다. 진눈깨비가 짙게 내리던 날, 이른 아침이지만 마치 지정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사람들로 이미 반 정도 채워진 카페에 나도 자리 잡았다. 아침에 혼자 일하는 직원은 일손이 ..
소꿉 친구의 책을 읽으며 마시는 커피 6월의 날씨 좋은 어느 날. 길을 걷다 멀리 보이는 작은 카페로 걸어갔다. 이 카페는 9시에야 문을 여는 느긋한 카페인데 구시가에서는 흔치 않게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한 거리에 콕 박혀있는 구조라 바깥 자리가 없을 때가 많은데 원체 일찍이라 사람이 없어 안락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이런 저런 메모를 할 생각으로보통 카페에 가지만 막상 커피를 앞에 두고 앉으면 대화창을 열게 된다. 책 발간을 앞두고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생활 패턴도 다르고 시차까지 있으니 대화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지만 절묘하게도 드디어 발간 날짜가 정해졌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친구의 책을 읽게 되면 이 카페에 와서 읽겠다고 계획했다. 얼마 후에 놀랍게도 친구가 책을 손수 보내왔다. 빨간 토마토가 그려진 예쁜..
7월의 코트 주말에 날씨가 쌀쌀해 보여 이때다 싶어 봄 코트를 입고 나갔다. 속에 이것저것 껴입으면 겨울의 끝머리에도 얼추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겨울의 끝머리라고 하면 4월이 훌쩍 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정오가 넘어가자 날씨가 화창해졌지만 큰 무리 없다. 이곳에서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스펙트럼은 약간 2호선 지하철 같은 느낌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녹색 밧줄 위에서 왕십리와 낙성대가 지닌 이질감 같은 것.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친구는 우산까지 들고 있다. 우리는 비가 올법한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옷을 걸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코트가 떨어져 있다. 7월의 코트가. 마치 지난겨울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Vilnius 172_빌니우스의 파블로바 필리에스 거리에서 미콜라스 성당을 잇는 미콜라스 거리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고 서울로 귀환하신 이웃님이 알려주셨다. 빌니우스의 새로운 소식들을 도리어 이웃님께 전해듣기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이 거리에는 나의 식당 동료가 태어나서부터 살고 있는 집이 있어서 자주 갔고 그의 집 마당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고 오곤 했다. 간혹 여행객들이 그 마당에 들어와 기념 사진을 찍는데 도무지 왜 사진을 찍는지 이해할 수 없다던 친구. 여름이 돌아올때마다 휴가비를 들여 빌니우스 근교의 여름 별장을 수리하더니 요즘은 아예 그곳에서 노부모를 모시며 출퇴근 하고 있어 정작 집은 보금자리가 필요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내어주었단다. 친구집에서 돌아올때마다 바리바리 싸주는 잼이며 통조림이며 물려주는 아이들의 옷을 짊어 지고 오느라 택시..
커피들 빌니우스에서 13번의 겨울을 나는 동안 가장 따뜻한 겨울이다. 모든 생명체가 예고를 하고 나타나듯 카페도 예외는 아니다. 카페의 삶도 '이곳에 곧 카페가 생깁니다' 라는 문구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생긴다고 하는 카페가 생기지 않은 적도 있으니 첫 잔을 마주하기전까지는 경건한 마음으로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는 열었을까 하고 찾아 갔던 어떤 카페. 사실 구시가의 척추라고 해도 좋을 거리이지만 차량통행이 일방통행이고 반대 차선으로는 트롤리버스만 주행이 가능해서 유동인구가 적고 저 멀리에서 신호라도 걸리면 온 거리가 적막에 휩싸여버리는 거리이다. 건물 1층의 점포들은 대체로 뿌연 회색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누구에게 임대를 해서 뭘 해도 잘 안되니 왠지 건물 주인이 뭐라도 해보겠다고 궁여지책으로 시작..
10월의 토닉 에스프레소 빌니우스는 사실 그다지 작지 않지만 중앙역과 공항이 구시가에서 워낙 가까워서 구시가만 둘러보고 돌아가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겐 작고 아담하다는 인상을 준다. 중앙역에 내려 배낭을 매고 호스텔이 있던 우주피스의 언덕을 오르던 때가 떠오른다. 한때는 꾹꾹 눌러쓴 연필자국처럼 짙고 선명했던 여행의 많은 부분들은 이제 서너장 넘긴 공책 위에 남은 연필의 흔적처럼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역에 내려 처음 옮기는 발걸음과 첫 이동 루트는 한 칸 들여쓰는 일기의 시작처럼 설레이고 선명하다. 몇 일 집을 떠나 머물었던 동네는 공항가는 버스가 지나는 곳이었다. 낮동안 오히려 더 분주하게 날아다녔을 비행기이지만 막 이륙한 비행기인지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인지 그들이 내뿜는 굉음이 오히려 밤이 되어 한껏 더 자유분방해진채로 어둠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