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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소꿉 친구의 책을 읽으며 마시는 커피



6월의 날씨 좋은 어느 날. 길을 걷다 멀리 보이는 작은 카페로 걸어갔다. 이 카페는 9시에야 문을 여는 느긋한 카페인데 구시가에서는 흔치 않게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한 거리에 콕 박혀있는 구조라 바깥 자리가 없을 때가 많은데 원체 일찍이라 사람이 없어 안락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이런 저런 메모를 할 생각으로보통 카페에 가지만 막상 커피를 앞에 두고 앉으면 대화창을 열게 된다. 책 발간을 앞두고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생활 패턴도 다르고 시차까지 있으니 대화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지만  절묘하게도 드디어 발간 날짜가 정해졌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친구의 책을 읽게 되면 이 카페에 와서 읽겠다고 계획했다.


얼마 후에 놀랍게도 친구가 책을 손수 보내왔다. 빨간 토마토가 그려진 예쁜 상자에 담아서. 마치 창간 잡지 부록으로 주는 한정판 브로마이드처럼 학창 시절 함께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한 장씩 사서 모으던 수입 영화 엽서 묶음도 넣어줬다. 나에겐 명화에 가까운 이 작품들을 그렇게 세금 한 푼 안 내고 상속받았다.

친구의 책을 들고 계획했던 카페에 갔다. 카페 직원이 아주 맛있는 디저트가 있다고 맛보라고 해서 원래 먹으려던 케이크 대신 그걸 선택해서 먹었는데 왠지 내가 먹으려던게 더 맛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어떤 것이 더 맛있었을지는 미궁 속에 남았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안했다. 설탕을 달라고 하니 아기자기하게도 샷잔에 부어주는데 마치 모래시계를 새로 뒤집은 듯한 그 순간에 나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춘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물이 든 컵이라도 떨어지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달까.

친구의 책은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고심고심해서 썼을 친구에게 미안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술술 읽혔다. 쓰겠다는 책을 써내고야 만 소꿉친구가 대견하고 대단하고 동시에 부럽기도 했다. 앞서 모습을 드러낸 단어들이 뒤따라오는 단어들을 꽉 붙잡고 그 문장들은 또 뒷 문장들에 바짝 달라붙어 글귀들이 롤러코스터에서 손을 흔들며 흥겹고 신나게 질주하는 느낌이랄까. 늘 아이의 이야기가 등장하니 친구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어느날 갑자기 각자의 인생에 주책없이 끼어들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질긴 인연이 그저 신기하면서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2년반 전에 집 앞 호텔 로비에 친구가 갑자기 나타났다. 책을 쓰기 위해 여행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내가 처해있던 상황을 고려하고 배려했을 일종의 비밀 작전이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온다는 걸 알았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도 잠깐 상상했다. 누군가가 스스로 때가 되면 알려주는 소식들이 더 건강하고 진실된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강박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웬만해선 질문을 잘 안 하는 편이다. 빌니우스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이 워낙에 짧기도 했지만 여행에 대해서도 책에 대해서도 역시 구체적으로 물어보진 못했었다. 아직 여행의 인상이 채 가시지 않은 한없이 즐거워 보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책을 읽는 내내 그날 대화 속의 흥분된 어조와 호기심 가득했던 눈망울이 느껴졌다. 이따금 웹상에 풀어 놓는 또 다른 여행 이야기들에서 그날의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친구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든 또 빌니우스에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길을 가는 나를 부르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는 나를 툭 건드린다거나 혹은 내가 좋아하는 카페 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올지 모를 미래의 친구에게 또 만나서 반갑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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