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에 기대했던 몇 편의 영화가 있다. 아리 애스터의 <에딩턴>, 켈리 라이카트의 <마스터마인드>처럼 좋아하는 감독들의 신작들이 있었고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엄밀히 말해서 <언컷젬스> https://ashland.tistory.com/895 를 보자마자 2019년부터 기다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이들이 각각 종합 격투기 선수와 탁구 선수가 주인공인 전기 영화를 크랭크인한다고 했을 때엔 솔직히 김이 샜다. 운동선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아주 확고한 패턴이 있다. 전성기를 누리고 다시 밑바닥을 찍고 다시 위로 올라가거나 하는 뭐 그런 전개. 그러니 사프디 형제가 만드는 전기 영화는 조금은 다를 거라 기대하면서도 과연 그 견고한 전기 영화의 서사를 어떤 식으로 깰까 궁금했다.
동생 베니 사프디의 <더 스매싱 머신>은 그 패턴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 운동 영화의 박진감을 어느 정도 희생하면서 승부에 집착하느라 놓쳤던 평범하고 진솔한 삶에 대해 생각하는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특유의 날카로움은 구현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쉬 사프디가 여전히 로널드 브론스테인과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감독 다리우스 콘쥐를 데리고 심지어 티모시 샬라메라는 슈퍼스타까지 끼고 나온다니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컷젬스> 이후에 신중하게 칼을 갈았을 사프디 형제와는 다른 궤도에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 올린 젊은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언컷젬스>의 아담 샌들러를 능가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굿타임> https://ashland.tistory.com/559006의 로버트 패틴슨에 못지않은 망가지는 꽃미남의 계보를 이을 수 있을지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어떤 감독을 좋아하고 그 스타일에 매혹되어 있을 때 영화가 그 비슷한 기대감을 계속해서 충족시켜 주길 바라는 것은 한편으론 무모한 팬심이다. 연출자 자신이 그 스타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을 수도 있을 테니. 그러니 엄청난 대형 제작사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영화의 연출자가 되어 갑자기 너무 이상한 영화를 들고 나오기도 하고 전작의 참신함을 능가할만한 영화를 만드느라 과해지기도 한다. 이 영화 역시 아리 애스터의 <에딩턴>처럼 조금은 과해진 경향이 있지만 궁극의 욕망 하나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장애물들을 걷어내며 두둑한 배짱으로 계속 판을 키우는 인물을 묘사하는 특유의 스타일은 건재했다. 전작들의 스타일과 스케일을 마음 놓고 확장해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고 그런 영화를 기다리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포부도 느껴진다. 유대인 사회에 관한 내부자 고발 같은 시선을 장착하고 성공 만능의 공격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냉소도 전작에서처럼 그대로 유지했다. 그래서 오히려 스포츠 영화나 전기 영화 같은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마티(티모시 샬라메)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어느 정도 미국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혼잡하고도 지지리 궁상맞은 유대인 커뮤니티 속에서 삼촌이 운영하는 신발 가게에서 일한다. 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딴생각뿐이다. 그는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는 기고만장한 남자이며 그것은 주변사람들을 마술처럼 움직인다. 마티는 당장 탁구 경기가 열리는 런던행 비행기표를 사야 한다. 삼촌은 조카가 신발을 팔면서 부를 축적하길 바라며 조카의 탁구왕 꿈을 꺾어버리려고 한다. 삼촌에게서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하자 결국 직원을 협박하여 금고를 털어 마티는 런던으로 간다. 그리고 결승에서 일본 선수에게 지면서 마티는 다음 경기를 생각하며 칼을 간다. 하지만 마티가 열심히 탁구 연습을 하는 전형적인 운동 영화의 장면은 펼쳐지지 않는다. 각종 이벤트성 탁구 경기에 참가하며 돈을 버는 마티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빠른 속도의 파노라마로 지나갈 뿐이다.
런던에서 엄청난 금액의 빚독촉장이 날아오고 금고를 털린 삼촌이 이 기회에 탁구 꿈나무를 짓밟아 버리겠다고 결심하면서 마티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욕조가 바닥을 뚫고 가라앉으면서 아랫집의 피도 눈물도 없는 유대인 아저씨(아벨 페라라)가 팔을 다치고 그의 정말 소중한 개 '모세'마저 부상을 입으면서 마티의 삶은 혼돈으로 빠져든다. 내기 탁구에서 사기를 치고 도망치다 주유소에 불이 붙고 남편이 있는 옛 친구 레이철(오데사 아지온)은 마티의 아이를 임신한 채 마티를 찾아온다. 마티는 모세를 수의사에게 데려가서 치료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지만 그 위대한 개마저 사라진다. 모세는 십계명이라도 받으러 시나이 산으로 올라간 걸까.
모든 상황이 마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폭주한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사람이 죽는다. 돈줄이 될 것 같아 마티가 끊임없이 접근했던 잉크 회사 사장은 탁구가 인기인 일본에서 돈을 벌기 위해 마티가 친선 경기에서 또 한 번 일본 선수에게 져주길 바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얻어맞는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일본에 간 마티는 다음 탁구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친선 경기의 패배는 연출이었다며 폭로하고 다시 한번 제대로 된 경기를 하길 원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상당히 정신없어서 내용을 전부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마티를 순수하게 응원하기에 그가 저지르는 범법들이 <언컷젬스>의 하워드 못지않다는 것이다. 마티는 보란 듯이 십계명의 항목들을 조목조목 배신한다. 남편 있는 여자들과 잠을 자고 도둑질은 물론 어쩌다가 사람도 죽는다. 탁구 대회에 나가서 이기겠다는 마티의 꿈이 부질없는 탐욕도 아니고 하물며 무슨 우상숭배도 아닐 텐데 퀭한 눈으로 죄를 지으면서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며 주변인들을 구워삶는 마티의 언변에서 위태로움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뉴욕이다. <언컷젬스>가 택도 떼지 않은 명품 셔츠를 입고 다니는 뉴욕의 스포츠도박광 보석상의 몰락을 보여주며 유대사회가 일궈놓은 구역질 나는 21세기 물질주의의 정점을 보여준다면 <마티 슈프림>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바탕을 다지는데 골몰하고 있는 감독의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그곳엔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담을 털어놓는 유대인이 나오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다짜고짜 비난하기 전에 상대의 요구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얻기 위해 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 관한 조소들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 감독 자신이 유대 혈통이 아니었다면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 만한 묘사들이 <언컷젬스>에 이어서 통쾌하게 펼쳐진다.
마티가 이집트의 피라미드 앞에서 탁구를 펼치고 피라미드의 돌을 잘라가지고 와서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장면은 누가 봐도 에티오피아의 광산에서 오팔을 채취해 내는 사람들로 시작하던 자신들의 영화인 <언컷젬스>를 기꺼이 스스로 오마쥬 했단 생각이 들게 한다. 일종의 팬서비스처럼. 영화 초반부터 우주를 유영하듯 마티의 정자가 헤엄쳐서 수정이 되는 장면도 <언컷젬스>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워드의 대장을 거쳐 오팔이 자아내는 신비한 세계를 통해 하워드의 얼굴에 관통한 총알구멍으로 계속 빠져들게 만들었던 장면의 반복이다. 이들은 돌과 구멍에 페티시가 있는 것도 같다. 린다의 방 천장에 뚫린 구멍 속으로 별이 반짝이는 우주가 드러날 때 오색 빛깔을 뿜어내던 하워드의 오팔이 보이고 그 오팔에서 승리의 여신을 발견하고 집착하던 농구 선수 케빈 가넷의 눈빛에서 마티를 보게 되는 식이다.
이 영화는 비록 감독의 전작만큼의 '완벽하게 기쁜 나쁘고 더러운 일체감'을 주진 못했다. 마티를 움직이게 한 과도한 자신감이과 탁구에 대한 집착은 나름 경쾌하게 마티의 가벼운 몸동작을 즐기게 했 지만 <언컷젬스>의 하워드는 완벽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 보다 탐욕스럽고 육중하게 움직였고 그럼에도 그에게 우리가 가졌던 연민을 매 순간 보기 좋게 배반하면서 결국 너무 허무하게 죽어서 결과적으로는 더 기억에 남는 인물이 된다.
사프디의 특기 중 하나는 절묘한 캐스팅인데 이 영화에서도 여전했다. <사울의 아들>에서 존더코만도로 나오는 뢰리히 괴자가 이 영화에서는 강제수용소를 경험한 유대인이자 초반 마티의 복식 파트너로 나와서 온몸에 꿀을 묻혀서 굶주린 수감자들을 핥도록 했던 기괴한 에피소드를 웃으면서 얘기하고 잃어버린 개 모세에 집착하여 마티와 함께 폭주하는 무서운 인물은 감독 아벨 페라라이다. <언컷젬스>에 캐빈 가넷이나 위켄드가 갑자기 나오고 제작에 참여한 <다리가 있다면 너를 걷어찰 거야>에 갑자기 래퍼 에이셉 라키가 나오고 이들 모두 심지어 굉장히 적절한 연기를 펼치는 걸 보면 정말 의아하다. 이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마티처럼 정말 설득력 있는 간곡한 부탁으로 이들을 섭외해서 카메라 앞에 끌고 와 자신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연기를 끌어내는 영악한 사프디 형제의 얼굴과 말발이 자연스레 겹쳐져서 웃음이 난다.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미친 듯이 뛰고 땀 흘리는 마티의 모습에서 비슷한 나이에 디카프리오가 출연했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떠올랐다. <배스킷볼 다이어리>와 <토탈 이클립스>를 거친 디카프리오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뷰티풀 보이> 를 거친 티모시 샬라메간에는 일종의 평행이론이 있다. 그것은 전도유망한 배우를 상대하는 할리우드의 경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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