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아리엘 (1988)



 
 

내 멋대로 '카티 오우티넨 3부작'을 만들어서 쓰다 보니 자연스레 건너뛸 수밖에 없었던 영화 <아리엘 Ariel>.  <천국의 그림자 Shadow in Paradise>(1986), <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 (1990)와 함께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 들어가는 영화이고 카티 오우티넨은 출연하지 않는다.

이렇게 특정 테마로 한배를 탄 영화들은 감독의 치밀한 구상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작 성향이 있는 감독들의 작품을 분류하는데 재미가 들린 평단의 팬심이 만들어낸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런 분류들은 비슷비슷해 보이는 감독의 영화마다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고 또 인물이나 영화자체를 좀 더 낭만화하는 경향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비교적 분명하고 서술적인 다른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제목과 비교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너무나 간단하고 그래서 좀 불친절하다. 도대체 아리엘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영화가 끝날즈음에야 우리는 알 수 있다. 
 
타이스토(투로 파얄라)는 전직 광부이다. 광산이 문을 닫자 어디로든 떠나라는 아버지로부터 아끼던 차를 건네받고 고향을 떠난다. 아버지는 차열쇠를 넘겨주자마자 식당 화장실에 가서 방아쇠를 당긴다. 타이스토는 카우리스마키 주인공들의 단골 대사인 '전부 인출해 주세요'를 외치며 은행 계좌에서 그 인생의 남은 가능성을 몽땅 찾아서 지붕도 닫히지 않는 자동차를 몰고 온 사방이 눈으로 덮인 황량한 침엽수림을 거센 바람과 함께 가른다. 그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그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우리의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한다. 자동차에서 내려 현금 뭉치를 들고 햄버거 가게를 유유히 향하던 '지나치게 있어 보였던'  타이스토는 깡패들에게 가진 돈을 전부 털린다. 그는 엉겁결에 부두가에서 일용직 노동자들과 섞이게 되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는 결코 찾아지지 않고 주차 위반 딱지를 붙이던 이르멜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싱글맘인 이르멜리의 삶도 쉽지는 않다. 할부로 산 가구값을 갚기 위해 쓰리잡을 뛴다. 
 
어느날 타이스토는 그의 돈을 뺏어간 강도를 우연히 만나서 혼쭐을 내주다가 도리어 강도상해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그리고 감방 동료 미코넨(마티 펠론파)과 탈옥을 한다. 이들은 위조 여권을 만들어서 밀항할 계획을 세운다. 타이스토는 돈이 없어서 헐값에 팔아버린 자신의 자동차를 다시 훔친다. 하지만 미코넨은 총을 맞고 죽어간다. 자동차에 누운 죽음직전의 그가 버튼을 누르자 그제야 자동차 지붕이 드라마틱하게 닫힌다. 타이스토는 미코넨을 묻어주고 이르멜리와 그의 아들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멕시코로 떠나는 거대한 선박 아리엘의 곁으로 다가간다.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많은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줄거리도 단순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한번 잘 살아보고자 어딘가에서 떠나오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큰 성공을 해야겠다는 포부가 있는것도 아니고 굉장한 한탕을 노리지도 않지만 평범한 이들이 평균의 삶을 꿈꿀수록 그 삶은 더 멀찌감치 달아난다.

이들 모두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계 속 부품이 되어 도시곳곳에 포진해 있다. 누군가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쓰레기 컨테이너를 비우고 누군가는 공장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고 어떤 이는 밤새도록 경비를 선다. 도시는 그들로 인해 조금은 안전하고 깨끗하게 돌아가지만 정작 이들을 쉽게 품어주지 않고 커다란 선박들이 정차해 있는 망망대해는 쉽게 발붙이지 못하는 그들의 방랑벽을 더욱 부채질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이곳을 미련 없이 떠나라고.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그들을 밀어낸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상처 내려는 모든 도전들에 이들은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표정과 제한된 대사들로 반응한다. 그런 연출이 오히려 이 단순한 플롯을 굉장히 극적으로 만든다.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알게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아무말없이 도시를 배회하고 술을 마신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거나 반성하는지도 모르고 다음번 선택이 만들어낼 상황들을 재현하며 고심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의도했든 다음 스텝은 항상 꼬인다. 
 
우리는 보통 영화 속 주인공이 그토록 열망하는 것을 손에 쥐었을 때 함께 기뻐하며 웃지만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최종적으로 떠나는 것 말고는 원하는 것을 이룩하는 기쁨을 거의 맛보지 못한다. 그러니 관객에게 어떤 평범한 성취의 기쁨을 느낄 기회는 없으며 등장인물들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며 그나마 그런대로 평범하게 잘 굴러가는 자신의 삶에 안도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독이 우리에게 작은 기쁨을 주려 만들어낸 장면들은 존재한다. 이들이 커다란 서버에 담긴 완전히 뜨겁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커피라도 대접받는 순간이고 집을 나와 단 하루 머물게 되는 타인의 집에서 깨끗한 침대시트를 건네받는 순간이며 그 누구와도 불필요한 말다툼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아주 일상적인 비난의 눈초리조차 보이는 법을 모르는 표정 없는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따스함이다.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 속 주인공들은 어떤 욕구를 어떤 완벽한 장면에서 충족해야 한다는 기대를 잘하지 않는다. 타이스토는 바람 부는 바다에 누워서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물에 담그고 음악을 듣는다. 그들은 타인이 만들어낸 이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 자신이 원하는 핵심에 불순물 없이 되도록이면 직접적으로 연결되려는 순수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 그렇게 소박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불행은 더 부당하다. 세상은 삶에서 절대 밀려나지 않는 방법들에 대해 이렇게 족집게 같은 답을 알려주는데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인생은 결국 구제해 줄 수 없다는 매몰찬 태도를 취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런 세상을 원망하는 법도 모른채 다시 어딘가로 떠날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