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사로운 튀니지의 지중해를 벗어나 차가운 속초의 겨울바다로 간다. 수하(벨라 킴)는 엄마(박미현)와 단 둘이 살며 속초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한다. 새로운 투숙객이 오면 방을 안내하고 그들이 떠나간 방을 청소하고 그들이 먹을 음식도 만든다. 늘 체구보다 큰 옷 속에 마른 몸을 숨기고 음식을 할 때마다 김이 서리는 안경을 걷어내며 뜨내기들을 상대하는 많은 그곳 사람들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엄마는 언젠가 속초에 도착했던 프랑스인과 사랑에 빠지고 수하를 낳았다. 남자는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알고도 속초에 남지 않고 떠나온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프랑스인 예술가 얀(로쉬디 젬)이 수하가 일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다. 수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생각하며 배웠을지 모를 프랑스어로 얀과 대화하며 속초의 구석구석을 여행한다.
속초 하면 바다가 생각나니 겨울 바다를 많이 볼 수 있을줄 알았지만 그렇진 않다. 잡아 온 오징어의 내장을 꺼내서 속을 채우고 복어의 독을 제거해서 정교하게 회를 뜨고 게스트 하우스의 곳곳을 손보며 지나가는 하루, 관광객을 상대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살가우면서도 기계적이고 내일 당장 누군가 그곳을 떠난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영화 속에서 속초의 바다는 그렇게 이미 바다에서 건져진 것들을 통해 일상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수하와 얀은 산으로 올라간다.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는 즉각적이고 변화무쌍하지만 커다란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산의 묵묵한 풍경은 좀 더 깊은 세월을 감내한듯한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런 바위가 만들어내는 우연의 곡선을 따라가며 신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높은 산 위에서 수하가 얀에게 들려주는 전설들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신화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아무리 바위의 모양과 위치를 설명해도 타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봉우리의 실루엣들,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바위와 바다에서 뛰어올라 다른 세상으로 가려다 구름 속에 갇혀버린 물고기 바위는 수하 그 자신의 숨겨진 결핍과 욕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를 기다리다 체념한 엄마의 슬픔을 보고 자랐을 수하는 물고기가 갇혀버린 구름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산봉우리 위에서 아직은 이곳에 머물어야 할 이유를 찾는다.
영화는 얀이 어쩌면 수하의 아버지일지도 모르고 얀과 수하 사이에 깊은 감정이 생겨날지 모른다는 상상을 부추기지만 속초라는 낯선곳을 찾아온 이방인과 여러 경계에 놓인 수하의 내면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수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얀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언젠가 엄마를 놔두고 떠났던 아빠를 떠올리면 잠깐 머물기 위해 온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면서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리고 얀은 떠난다. 수하와 함께 비무장지대에 함께 다녀온 얀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인 그저 슬픈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기다리는 순간은 희망이고 건강한 감정일 수도 있다고.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언제나 함께 있는 상태에서의 채울 수 없는 거리감이라고. 한편으론 외부자의 안일한 시선일 수도 있고 떠나버릴 사람들이 뱉어내는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지만 떠난 사람의 마음을 그저 매정하고 쉬운 결정이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 남은이들의 삶을 더 쉽게 만들어주진 않기에 수하는 어쩌면 자신의 아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좀 더 단단하게 받아들인다.
별달리 꾸미지 않는 수하는 늘 주변사람들에게 외모를 지적당하지만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려는 의지없이 그 자신에게 머물려고 하는 원칙 역시 그녀를 또 다른 경계에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수하는 서두르지 않고 그 경계를 천천히 인식하려고 한다. 속초와 러시아를 잇는 선편은 이제는 없어졌지만 속초는 나에게 떠남의 정서로 충만한 도시이다. 그래서 아마 수하가 떠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며 계속 영화를 본 것 같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간섭하던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수하는 계속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남는다.
이 영화는 한국계 프랑스 작가인 엘리사 슈아 뒤사팽의 작품이 원작이라고한다.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사실 영화를 보면서는 경계인으로써의 수하의 정체성 갈등보다는 속초라는 공간속에서 서로 소외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 자체에 더 이입됐다. 경계인의 정체성 소재라면 오히려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인을 그렸던 <리턴 투 서울>이란 영화가 좀 더 와닿았다. 두 영화 모두 프랑스어를 하는 한국인들이 나와서 계속 생각하면서 봐서 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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