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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2002)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떠도는 구름 Drifting Clouds> https://ashland.tistory.com/559090 을 잇는 핀란드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트릴로지로 묶여있는 이 영화를 비롯해서 2000년도 이후의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색감도 훨씬 선명해지고 배경을 롱샷으로 잡는 경우도 훨씬 많아진다. 핀란드 3부작은 어쨌든 핀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한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이니 그전 영화들에 은근히 남아있던 소련 분위기가 조금씩 없어지고 줄거리도 다소 복잡해진다. 마르카를 내밀며 커피를 사던 주인공들은 유로를 내밀기 시작하고 은행에서 단순히 돈을 인출하는 대신 은행 대출을 받으러 다니고 주인공들에 대한 묘사보다는(어쩌면 이제 우리가 그들을 잘 알아서) 그들이 뚫기 힘든 체계적이고 견고한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프롤레타리아 트릴로지에서는 일로나와 니칸더, 타이스토와 이르멜리처럼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이 짝을 지어 연대하는 모습을 부각하지만 이후의 영화에서는 그런대로 사회적 약자들을 최대한 돌보려고 하는 기관의 모습도 그려진다. 하지만 물론 주인공들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리고 더 가혹한 전문 악당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틀어서 표현한다.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해도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끊임없이 방해를 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여전히 대놓고 분노하는 법을 모른다.
 
어떤 남자가 늦은밤 기차를 타고 헬싱키에 도착한다. 근처 공원에서 잠이 든 그는 깡패들한테 묻지 마 폭력을 당하고 라디오와 용접 마스크 등 그가 차곡차곡 채워온 그의 과거가 담긴 여행가방은 내동댕이쳐지고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진다. 남자는 사망판정을 받지만 다시 살아나고 대신 모든 기억을 잃는다. 그가 누군지 말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남자의 과거가 없어진다. 이것은 마치 밀레니엄 이전의 기억은 전부 잊어버리게 만들어주겠다는 감독의 포부 같다. '그때가 그런대로 좋았다. 이제는 전혀 다른 놈이 온다. 준비해'라고 말하는 듯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해줄 수 있는것은 그의 거친 손바닥, 헤매는 용접공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용접기계를 잡는 민첩함, 얼굴의 적당한 굴곡과 주름과 딱히 즐거워 보이지 않는 표정뿐이다. 핀란드어를 할 수 있으니 외국인도 아닐 거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용접 마스크를 들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도시를 향했던 소도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고향을 벗어나 외국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번영한 헬싱키로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온 남자에게 도착첫날부터 생긴 일들은 참 가혹하다.
 

 
 
잠시 강변에 누워 잠든 그의 신발을 부랑자가 벗겨가는 모습은 야속하지만 그를 발견한 문닫은 조선소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남자를 돌봐주고 음식도 나눠준다. 그곳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구세군 차량에서 주는 무료 급식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과 지난겨울 동사한 사람이 남긴 컨테이너를 바다뷰라는 이유로 비싸게 임대하려는 경비원 안틸라(사카리 쿠오스만)가 공존한다. 성냥갑 속에 다 쓴 티백을 넣고 식당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부탁하는 남자에게 식당 직원들은 따뜻한 음식 한 대접을 제공한다. 따뜻한 수프 한 접시를 비울동안 구세군 악대는 음악을 연주한다.
 
남자는 구세군 직원 이르마(카티 오우티넨)과 사랑에 빠진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려고 하지만 신분증명이 안돼서 은행 계좌를 열 수도 없고 고용센터에도 등록할 수도 없다. 하지만 과거를 잃어버린 그의 처지를 떠올리더라도 크게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완전한 시작점에 서있다. 그런대로 그를 도우려는 사람들이 있고 불행과 실패의 기억은 없다. 남자는 그가 무엇을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지 조차 모른다. 결국엔  그가 누구였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그를 사회가 품어줄 수 있을지의 문제만 남는다.
 
남자는 우연히 은행 강도의 목격자가 되어 경찰서에 불려가지만 신분을 밝힐 수 없으니 오히려 수사비협조로 갇히게 되고 국선변호사가 짠하고 나타나서 그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역설하며 구해준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전단지가 붙고 그의 아내가 연락하면서 그의 신원은 밝혀진다. 밝혀진 그의 과거가 이르마와의 애정전선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아내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그들은 이혼 준비 중이었다. 남자는 결국 그 자신이 누군지는 알게 되지만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로 계속 살아간다. 
 
기억을 잃어버린 인물들이 나오는 영화들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통 그 자신과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절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가 잘 살 수 있을거란 희망을 품게 한다.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이미 곁에 있고 그 자신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핀란드 3부작은 삶이 쉽지 않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것에서는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지 않다. 단지 그간 감독이 쌓아 올린 많은 이야기들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 순환시킨다. 자신이 겨우 자리 잡아놓은 삶이 타인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에도 마치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듯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사람들 삶 속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포식자와 약자의 관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밑바탕에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보인다. 
 
이 영화속의 은행강도는 언젠가 대출을 받아 쓰레기 수거업체를 차리려고 했던 배우 에스코 니카리가 연기한다. 그는 빚 만지고 파산한 자기 회사의 은행 계좌가 막혀 월급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은행을 턴다.그리고 니칸더를 연기한 마티 펠로펜의 사진이 걸려있는 바에서 기억을 잃은 남자를 만나 훔친 돈을 옛 직원들에게 나눠달라고 부탁한다. 언젠가 대출도 받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은 남자는 결국 대출을 받아 자기 회사를 차리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실패한 기업인이 되어 방아쇠를 당긴다. 남자에게 터무니없는 오션뷰를 앞세우며 컨테이너비를 한 푼 더 받아먹으려고 했던 임대 업자는 탐욕스럽고 인정사정없이 보여야 하는 게 맞지만 그를 연기한 사카리 쿠오스만에게서 우리는 쓰레기트럭에서 니칸더에게 치즈를 나눠달라고 애원하던 말라르틴(천국의 그림자) https://ashland.tistory.com/559085 과 해고된 도어맨 말라르틴(떠도는 구름)을 떠올리고 단지 살기위해 애쓰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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