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인생 40년을 내 기준에서 두리뭉실하게 나눈다면 구소련 붕괴 즈음의 1990년대까지,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그리고 그 이후의 영화들이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과 핀란드 3부작을 비롯하여 그 트릴로지의 색채가 짙은 영화들이 그 중간을 섭섭치 않게 지탱하고 1990년 이전은 카우리스마키식으로 재해석한 고전들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고약한 영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영화들은 유머의 톤도 조금 달라지고 색감도 비교적 선명하고 따사롭다. 따뜻한 수프에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조각을 넣어 먹을 때 부들부들해지는 빵처럼 마음이 풀리는 그런 느낌.
<식당남자 The Tavern Man>는 핀란드 3부작이 끝나고 프랑스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 Le Havre>(2011)https://ashland.tistory.com/849 로 떠나 핀란드를 벗어난 감독이 포르투갈에서 찍은 15분짜리 단편이다. 포르투갈의 고도 기망라이스를 배경으로 네 감독의 단편 모음인 <센트로 히스토리코 Centro Historico>에 수록되어 있다. 마치 포르투갈의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우연히 들어갔던 식당에서 후다닥 만든 영화 같으면서도 특유의 분위기와 유머는 여전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전작들로부터 이어지는 어떤 인물들의 원형을 발견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식당'이다. 카우리스마키는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은 미식가이거나 아마 내세울 음식이 딱히 없는 핀란드 사람들의 미각존심을 그런대로 북돋으려 하는 요식업계의 눈물겨운 욕망을 마음깊이 헤아리고 싶은걸지도. 그 영화 속에는 그럴듯한 식당에 갈 여유가 없는 주인공들이 늘 최후의 보루처럼 향하곤 하던 햄버거 푸드트럭들이 즐비하고 정말 털릴 때까지 다 털리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앉았을때 커피 한 잔을 내어주는 어두운 카페들이 있다. 오래된 튀김용 기름 냄새와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주인공들의 마음을 그런대로 풀어주는 간이식당이 있고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 꽤 공들여 만든 노동 식당이 있다. 그 식당의 여정은 우스꽝스러운 식당 경영의 절정을 보여주는 <희망의 건너편 The Other Side Of Hope>(2017)까지 고집스럽게 이어진다.

포르투갈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나라이다. 난 그곳을 모르지만 겨울에 늘 지각 하는듯한 그곳을 채운 가을즈음의 식은 열기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포르투갈어 원작은 'O Tasqueiro'이다. 어떤 단어를 봐도 전부 음식 이름이거나 술일 것 같은 이 언어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 포르투갈의 거리에 서서 가장 가까운 Tasqueiro가 어딪는지 묻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경사진 언덕에 자리잡은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남자의 하루를 대사없이 보여준다. 종업원도 청소부도 없고 남자 1인으로 굴러가는 이 식당은 심지어 메뉴도 한 개뿐이다. 남자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거대한 오크통이 놓인 바닥을 대걸레질을 하고 오래 끓이면 안 될 것 같은 야채를 듬성듬성 잘라 하루 온종일 수프를 끓인다. 그리고 뭉툭한 잔에 레드 와인과 그린 와인을 무표정하게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아무도 음식을 주문하지 않는다. 건너편 식당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걸 보고 남자는 나름 그 집 메뉴를 탐구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의 시그니처 수프에 마른 생선을 추가하는 것으로 혁명적인 시도를 하지만 맛은 형편없다. 저녁에 무도회장에 가서 나름 사회적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고 꽃 한다 발을 들고 정거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옅은 축구 중계방송 소리가 흘러나오는 집으로 혼자 돌아온다. 고양이를 위한 물 한 접시를 문 밖에 내놓지만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카우리스마키 영화 주인공들에 그득그득 들어찬 카르마와 윤회를 생각하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누군가는 자연스레 <황혼의 빛 Lights in the Dusk> https://ashland.tistory.com/559095에서 코이스티넨을 악랄하게 괴롭히던 린드홈(일카 코이불라)을 떠올린다. 조직원의 배신으로 헬싱키를 떠나야 할 운명에 처한 남자는 훔친 보석 중 몇 개를 후다닥 여행가방에 넣고 헬싱키에서 찾아오기에 가장 먼 포르투갈을 향했는지도 모른다. 카세트도 챙기고 잘 나가던 시절 광을 내서 신던 구두와 화려한 쓰리피스 한 벌도 잊지 않는다. 신분 위장을 위해서 메뉴 한 개로 식당을 차려서 나름 새 인생을 시작하지만 그의 고독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포르투갈의 뜨거운 태양대신 그를 위안하는 것은 어두운 헬싱키 아파트의 블라인드를 뚫고 스며들어 주인공의 얼굴에 드리워지던 겹겹의 빛 뿐이다.

이 영화는 식사용 영화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분량은 더없이 짧고 결코 군침 돌게 하지 않는 평범한 음식 한 접시와 카우리스마키의 심심한 친구 한 명이 있다. 감독은 분명 단 한번도 40년의 영화 인생을 자로 잰 듯 계산하여 영화를 만들진 않았을거다. 따지고보면 다작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봐도 모든 영화들이 들어가있다. 속된 말로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겉도는 영화도 없고 구멍도 없다. 그런 영화 세계를 가진 감독은 정말 흔하지 않다. 이 감독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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